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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시민의 논평은 위정자의 스승

입력
2016.07.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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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정(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강대국도 약소국도 아닌 중간 정도의 국력을 지닌 제후국이었다. 강대국이 되고자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다지 아쉬울 바 없는 나라였다.

다만 나라의 위치, 그러니까 지정학적 위상이 문제였다. 하필 주변 강대국들 틈새에 끼여, 그들이 국세를 넓히고자 할 때면 줄곧 공략 대상 영순위가 되곤 했다. 한 마디로 잦은 외침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늘 주변 정세를 정확하게 꿰차며 강대국 사이서 균형과 실리를 갖춘 외교를 펼쳐야 했다. 저 옛날, 중국에 있던 먼 나라지만 지금 우리와 똑 닮아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중반, 자산(子産)이란 이가 집정으로 취임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정확한 상황 판단과 남다른 문제 해결 능력 등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터였다. 그가 그러한 탁월함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박학다식이었다. 이는 독서를 폭넓게 그리고 꾸준히 하지 않으면 갖추기 힘든 역량이다. 선대부터 정 나라 정치를 좌우하는 권문세가의 후예였지만, 자기 계발과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셈이다.

덕분에 그가 집정이었던 20여 년간, 정 나라는 밖으로는 외침을 막을 수 있었고, 안으로는 귀족 계층을 적절히 제압하는 한편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나라의 부강과 안정을 일궈냈다. 그 결과 백성이 전에 비해 한결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가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능했음이니, 본래 외교와 내정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 어느 하나만 잘할 순 없는 것이었다.

하여 공자는, 그가 사상 처음으로 성문법을 제정했고, 덕치가 아닌 법치로 국정을 운영했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그의 부고를 접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는 옛 성왕의 사랑을 물려받아 행한 이였다”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평소에도 공자는 백성의 삶이 안정되고 윤택해지면, 위정자가 신봉한 게 무엇이냐를 묻지 않고, 다시 말해 이념을 따지지 않고 주저 없이 그를 상찬하곤 했다. 민생은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이념이든 공유해야 하는 우선적 가치였음이다.

그래서인지 춘추시대 역사를 나름 충실히 담은 ‘춘추좌전’엔 자산의 언행이 많히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일화가 전한다. 기원전 542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나라 국인(國人)들이 향교에 모여 교유를 하며 자산의 정사에 대해 갑론을박하자, 연명이란 이가 자산을 찾아가 향교를 허물어버리자고 건의했다. 요새로 치자면, 국인은 참정권을 지닌 시민에 해당되고, 본디 지방에 설치한 학교를 가리키던 향교는 공공장소쯤에 해당한다. 곧 시민들이 공공장소에 모여 위정자가 행한 정치의 잘잘못을 따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자산은, 오늘날 한국 상황에 견줘보면 참으로 부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그 요지는, 사람들이 각자 일을 마친 다음 모여 놀면서 위정자가 행한 정사를 논한 것, 곧 그들의 논평은 자신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좋은 것은 가져다 실행하면 되고 나쁜 것은 고치면 되기에 그렇다는 논리다.

그러고는 정사의 대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충선손원(忠善損怨)” 해야지, 곧 좋은 것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원망을 줄여야지, 위세로써 원망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 곧 “작위방원(作威防怨)” 해선 안 된다가 그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위정자가 위세로 국인들의 논평을 막음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과 같아, 방죽이 불시에 터지면 결국 위정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 나라와 여러모로 닮은꼴인 한국사회를 자산의 말에 비춰본다면 과연 어떠할까. 우리가 2,500여 년 전 자산의 시대보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자산 같은 위정자가 배출될 만한 토양을 갖추고 있기는 한 걸까. 스승 삼기는커녕 언론을 통제하고 걸핏하면 시민을 윽박지르더니, 이젠 위정자가 결정한 일에 대해 논쟁하지 말라고 한다. 급기야 정쟁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존재 이유를 잃은 주요 언론은 함량 미달의 정보와 정제되지 못한 언사를 꾸역꾸역 쏟아내고 있다.

선거에서 내가 행하는 한 표나 재벌이 행하는 한 표의 가치는 동등하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목소리는 위정자의 목소리와 사회적 비중이 동등하다. 다만 의사소통수단이 다양해지고 일상 깊숙이 침투, 그 지배력이 증강될수록 자기의 목소리를 정립하는 일이 녹록지 않게 된다. 자기 목소리를 어엿한 사회적 목소리의 하나로 소통시키고 지켜내는 일도 만만치 않게 된다. 특히 주요 언론이 기득권에 대한 비판과 감시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지금, 자기 목소리의 사회적 비중을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제는 시민들이라도 나서 국인들의 논평이 내 스승이라는 자산의 고양된 정신을 실천할 때다. 위정자가 돼서 시민의 목소리를 스승 삼을 줄 모를 때 이를 견책함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아무래도 지금은 스승들이 회초리를 들 때가 맞는 듯싶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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