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19평 대지에 우뚝 도서출판 갈무리 사옥 ‘뿔’

서교동 골목에 우뚝 선 도서출판 갈무리 사옥 '뿔'. 19평 대지 위에 지은 협소사옥이다. 류인근 제공

오래된 주택가, 발길을 재촉하는 것 외엔 달리 할 일 없는 이곳에서 건물 하나가 발을 붙잡는다. 골목 막다른 곳에 자리한 좁고 높은 흰 건물. 땅에서 솟았거나 하늘에서 내리 꽂힌 듯한 모양새가 결국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곳은 1994년부터 인문서적을 출간해온 독립출판사 갈무리의 새 사옥 ‘뿔’이다.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이자 정치철학자 조정환씨가 사옥을 지은 것은 창립 2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사당에서 시작해 잠깐 구로동에 머물렀던 것 빼고는 내내 마포구 서교동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이 많이 들었어요. 파주출판도시나 인근 부대업체들과도 가까워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에 세 들어 있던 건물의 주인이 바뀌고 월세를 올리면서 나가야 할 처지에 놓이자 조 대표는 아예 사옥을 지어 서교동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최근 이사한 제주도 집을 담보 잡아 돈을 마련했지만 오래된 연립주택 골목 사이 19평짜리 대지를 사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다.

1층 계단실. 계단 옆 버려지는 공간에도 장식장을 알차게 짜 넣어 수납공간을 늘였다. 계단의 형태에서도 조형미에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류인근 제공

가로 6m에 세로 10m. 방 하나에 거실 하나 정도의 땅 규모에 너무 작아 못하겠다는 건축가들이 줄을 이었고 그러다 만난 이가 조한준 건축가(더함건축)다. 그가 관심을 보인 이유도 “너무 작아서”다. “지금까지 제가 지은 건물들 중 가장 작았어요. 하지만 서울의 표정을 만드는 건 대로변의 랜드마크가 아니라 이런 작은 건물들입니다. 주변에 홍대나 연남동을 봐도 상권을 살아나게 하는 건 작고 개성 있는 건물들이잖아요. 작아도 훌륭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갈무리는 대표까지 포함해 전 직원이 5명인 작은 출판사지만 사무실 외에도 필요한 공간이 많았다. 우선 ‘다중지성의 정원’이라는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강의실, 조정환 대표의 연구실과 회원들이 토의하고 공부하는 세미나실, 그리고 1만5,000권이나 되는 책이 들어가야 했다. 공간의 한계 때문에 기존의 활동들이 위축되지 않게 해달라는 게 건축주의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책의 3분의 1 가량을 제주도로 내려 보냈지만 그래도 강의실을 만들려면 지하를 파야 했다.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땅을 파자 물이 흥건한 뻘이 나온 것이다. “서교동이 예전에 논밭이었다고 해요. 겨우 1m 파 내려갔는데 물이 나오더라고요. 지반이 약하면 이 건물뿐 아니라 주변 건물까지 위험할 수 있어요. 결국 지질조사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건물을 올리기도 전에 뻘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한쪽에선 좁은 골목과의 싸움이 이어졌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올 정도로 좁은 길목 끝에 위치해 있어 자재를 가득 실은 트럭이 위태롭게 오가고, 가져온 자재를 놓을 곳도 없어 때론 미완성된 건물 위에 자재를 올린 채 공사를 했다. 구청에선 하루에 한 번 꼴로 민원이 들어왔다. 조 소장은 “민원으로 시작해 민원으로 끝난 공사”로 기억한다.

온갖 고생 끝에 완성된 지하 1층의 강의실. 길고 가느다란 천창을 만들어서 전등을 꺼도 미세하게 빛이 들어오게 했다. 류인근 제공

시공할 땐 원수 같은 골목이었지만, 사실 이 골목은 건축가가 건물을 맡기로 한 결정적인 원인이다. 건물이 위치한 곳은 양쪽으로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늘어선 골목의 끝이다. 코너를 돌았을 때 멀리 정면에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마치 오래 찾던 것을 만난 듯한 감정의 착시를 일으키고, 건축가는 이 홀연한 만남 같은 자리에 반드시 비범한 건물이 들어서길 바랐다. 그는 전면에 창을 크게 내길 원하는 건축주를 설득해 하얀 외벽이 강조되는 덩어리 같은 디자인을 제안했다.

“건물이 아닌 오브제가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줬으면 했어요. 마치 땅으로부터 솟은 뿔처럼요. 마침 전면이 서향이라 창을 내는 게 채광이나 조망에 별 의미가 없었어요. 그것보다는 강한 표정을 가진,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물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가는 3층으로 올린 건물 위에 반 층을 더 만들었다. 높이가 9m를 넘어가면 사선 제한을 받아 면적이 절반으로 잘리는데 그것을 그대로 적용해 건물 위에 작은 뿔 모양의 돌출 부위를 만든 것이다. 뿔이라는 개념을 완성하기 위한 디자인이지만, 내부엔 책이 꽉 들어찬 실용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뿔의 한쪽 면엔 유리창을 냈다. 3층과 ‘뿔 층’이 분절되지 않고 가느다란 틈을 통해 연결되기 때문에 이 창이 3층의 간접 천창 역할도 한다. 북쪽에서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빛은 3층에 자리한 조 대표의 연구실을 은은하게 채운다. 조 대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로 꼽은 곳이다.

조정환 대표의 연구실 및 세미나실로 쓰이는 3층. 계단으로 이어진 위쪽 공간이 바깥에서 뿔처럼 보이는 곳이다. 3층과 뿔층을 완전히 구분하지 않아 책장이 이어진 듯한 느낌을 줬다. 류인근 제공
3층 위의 ‘뿔층’. 책을 빼곡히 수납했다. 뿔의 경사면에 낸 유리창이 3층의 천창 역할을 한다. 류인근 제공

건축가는 뿔을 강조하기 위해 건물 한쪽을 급한 경사로 깎아 내렸다. 내부적으론 계단실이 있는 곳이라 공간 활용도를 해치지 않고 외관 디자인을 바꾼 것이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건축주께 “뿔은 지켜주셔야죠”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뿔은 지켜야죠”라고 하셨습니다.(웃음) 만들고 보니 수확한 것을 잘 간수한다는 뜻의 갈무리란 말과도 통하는 데가 있어 결국 건물의 이름이 되었어요.” 뾰족한 뿔과 과감한 경사면, 그리고 창문 하나 빼곤 전부 벽으로 막힌 건물은 수직적인 역동감과 함께 무한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도대체 뭐하는 곳일까.

귀퉁이에 우뚝 솟은 뿔이 무한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저 건물은 뭐하는 곳일까. 박영채 제공

완성된 건물의 총 면적은 40평 남짓이다. 직전에 세 들어 살던 건물의 60평보다는 작지만 강의, 출판, 세미나 등 기존의 활동들을 차질 없이 수용한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골목을 지나가다 가까이 다가와 사진을 찍고 가거나 문을 열고 건물의 용도를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무표정한 동네에 표정을 만들고 싶다는 건축가의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이제까지의 작업 중 ‘뿔’이 가장 작았다는 조한준 소장은 지금 뿔보다 더 작은 주택 설계에 들어갔다고 한다. “내 집 지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앞으론 구도심의 작은 필지에서 건축적으로 중요한 변화들이 생겨날 거라고 봅니다. 1980, 90년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다세대ㆍ다가구 주택들이 이제 바뀔 차례가 된 거죠. 골목에서 시작된 크고 작은 표정들이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면 좋겠습니다.”

천편일률적인 주택가에 표정 있는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선다. 이 건물들이 모여 도시 전체의 표정을 바꾼다. 박영채 제공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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