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을 걷다(10) 서울 중구 명동(上)

명동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동상이나 표석 많지만 사람들은 관심 없어
재개발 공사로 시끄럽고 어수선해 아쉬워

서울 명동은 항상 분주하고 떠들썩하다. 가게와 음식점, 카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로 거리가 늘 북적거린다. 현대의 명동은 이렇게 상업의 중심지지만, 조선시대의 명동은 남산 기슭에서 충무로 을지로를 넘어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남촌의 일부분이었다. 청계천 북쪽의 북촌에 세도가가 많았다면 청계천 남쪽인 남촌에는 평민과 빈한한 양반이 많았다. 그러다 20세기 초 일본인이 남촌에 집단 거주지를 이루면서 명동은 상업ㆍ금융 지역으로 변신한다. 그래서 명동에는 근ㆍ현대 역사가 풍부하다.

●명동성당, 민주화의 성지에서 데이트 장소로

명동이 상업이 번성한 지역이지만 그래도 이 동네의 주인공은 명동성당이다. 역관 김범우가 이곳 자신의 집에서 신앙공동체인 명례방공동체를 결성한 것이 명동성당으로 이어졌다. 1898년 세워진 성당은 도성 안 어디서나 보일 정도로 우뚝했고 사람들은 성당을 보겠다며 몰려들었다.

6월 항쟁을 기억하는 이에게 명동성당은 아직도 정의와 양심의 공간이다. 김인국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는 “시위대 맨 앞에 추기경, 그 뒤로 신부와 수녀들이 섰으며 이를 보고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존중의 마음을 표했고 이로 인해 생긴 교회의 권위 때문에 공권력도 섣불리 농성장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1987년 6월을 회고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들른 성당에서 문득 당시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젊은이들이 성당 마당에 둘러앉아 자신의 생각을 돌아가며 말했는데 한 청년이 일어나 이곳을 한국의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스피커스 코너는 런던 하이드파크에 있는 발언대로,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29년 전 그날의 진지한 얼굴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새로 단장한 성당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즐거워하거나 데이트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회사 일로 바쁜 가운데서도 잠시 짬을 내 자신을 한번 돌아보거나 기도를 하려는 직장인들도 눈에 띈다. 외국에도 알려진 듯, 요즘은 반바지에 선글라스 차림의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본당 뒤편에는 지하성당과 고해소가 있다. 조용하고 깜깜한 지하성당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범 주교를 비롯해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안치돼 있어 저절로 숙연해진다.

명동성당 내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이 명동성당에서 셀카를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젊은 남녀가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었다.
중년의 남녀가 명동성당 뒷동산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1898년 완공된 명동성당은 순수 고딕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사적 258호로 지정돼 있다. 성당 앞에 고층 건물이 서있다.
외국인 여행객들이 명동성당 마당을 걷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한 이회영 흉상과 매국노 처단 나선 이재명 의거 터

성당 앞 길 가에는 이재명 의사 의거 터가 있다. 의사는 1909년 12월 매국노 이완용 일행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 참석차 성당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밤 장수로 변장해 비수로 그를 거꾸러뜨렸다. 그는 거사 직후 “공적을 죽였으니 기쁘고 통쾌하다”며 만세를 불렀지만 이완용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건너편 한국YWCA회관 옆 구석에는 가사 문학의 대가 윤선도가 살던 집이 있었다. 윤선도는 지금의 동숭동에서 태어났으나 여덟 살 때 이곳 명동의 숙부 집에 양자로 들어왔다. 집터 표석이 한쪽에 설치돼 있으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잇길로 들어가면 이회영과 동생 시영 등 6형제가 태어난 집터 표석과 2년 전 세운 이회영 흉상이 있다. 이항복의 후손으로 명문가 출신인 이들 6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형제들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고 대가족 60여명을 마차에 나눠 태우고는 영하 30~40도에 꽁꽁 얼어붙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라는 책에서는 이들이 처분한 재산을 2000년대 쌀값으로 환산해 600억 원에 이른다고 했지만 부동산으로 갖고 있었다면 그 값이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형제 중 넷째인 회영은 적서의 차별을 없애고 개가와 재혼을 장려한 진정한 근대주의자였다. 만주에 함께 간 노비들을 해방시키고는 “오늘부터는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라며 그들을 독립군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아나키즘으로 무장했다.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내놓은 바람에 형제들은 굶어 죽는 등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고 해방 후에는 다섯째 시영만 살아 귀국할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 흉상. 넷째 이회영을 포함해 6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형제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모진 고생을 했다.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칼을 들었던 장소. 명동성당 입구에 있다.

●6월 항쟁의 중심 향린교회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나석주 열사의 의거 터

이회영 흉상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향린교회가 보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53년 안병무 등 청년 신앙인 열 두 명이 신앙공동체로 세운 교회로, 스스로 향기 나는 이웃이 되겠다며 향린이라는 이름을 썼다.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기인 대회를 이곳에서 했다.

교회 부근은 요즘 재개발 공사로 소음이 끊이지 않는 등 매우 어수선하다. 쑥쑥 올라가는 높은 건물들이 교회를 압박하듯 짓누르는 것 같다.

발걸음을 돌려 도착한 KEB하나은행은 동양척식회사 본점이 있던 자리다.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회사는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의 땅을 가로 챘고 이 때문에 농민들은 소작농 혹은 거지가 되거나 낯선 만주 땅으로 떠나야 했다. 이를 보다 못해 동양척식회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이가 나석주 열사다.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입단했던 나석주 열사는 폭탄 투척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자 자결했다. 열사의 의거를 기리는 동상과 표석이 근처에 있다. 그는 최후의 순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000만 민중아 쉬지 말고 분투하라”고 절규했다고 전해진다.

동양척식회사 본점은 해방 후 국방부 정훈국으로, 한국전쟁 때는 내무부 건물로 쓰였다. 4ㆍ19 때는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 농성을 풀고 이 앞을 지나가다가 경찰의 총격을 받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 역으로 걸으면 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가 나온다. 경성전기가 사옥으로 사용한 건물로 1928년 세워졌다. 일본 관동대지진의 영향을 받아 국내 최초로 내진ㆍ내화 설계를 했고 엘리베이터도 설치했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건축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향린교회는 명동성당과 더불어 6월 항쟁의 중심지였다. 왼쪽 기둥에 항쟁 20주년을 기념해 2007년 6월에 세운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붙어 있다.
옛 동양척식회사 본점 옆에 나석주 열사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이곳에 폭탄을 던진 뒤 경찰과 대치하다 자결했다.
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로 사용하는 경성전기 사옥. 당시 서울 도심의 본격적인 사무실 건물이다.

●좌절된 친일파 청산과 반민특위 터

남대문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틀면 국민은행 본점이 나온다. 은행 주차장 입구 한쪽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 덩그렇게 놓여있다. 반민특위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검거해 재판에 회부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와, 친일세력이 온존해있던 경찰의 습격으로 급격히 위축됐다. 반민특위 활동이 무산되면서 친일파 처단과 민족정기 수립의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명동에는 이렇게 근ㆍ현대사의 흔적이 많지만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지나친다. 이 일대가 너무 많이 변해서인지 경성전기 사옥을 빼고는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도 별로 없다. 그래도 명동에서 혹시 동상이나 표석을 본다면 적혀있는 글이라도 한번 차분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khpark@hankookilbo.com

국민은행 주차장 입구에 설치된 반민특위 터. 반민특위는 친일파를 처단하고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발족했지만 경찰의 습격과 정부의 노골적인 방해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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