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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78년 전 오스트리아 국민의 선택

입력
2016.06.2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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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0월 어느 날, 쉰 살 생일을 맞이한 오스트리아 교육부 차관 레오니다스는 십팔 년 전에 헤어진 애인의 편지를 받는다. 그가 아홉 살 연하의 베라를 처음 만난 것은 궁색하고 비참한 대학생 시절이었던 스물세 살 때다. 철저한 신분 사회인 오스트리아에서 가난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던 고아 레오니다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한때를 유대인 의사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버텼다. 베라는 그가 가르쳤던 오빠의 여동생이다.

반유대주의자들은 나라도 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유대인을 ‘기생 계급’이라고 멸시한다. 그러나 프란츠 베르펠의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강, 2016)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모함을 전복한다. 아무런 미래도 없이 “날마다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레오니다스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기숙사 옆방에서 살던 대학 친구가 자살하면서 옷장 속에 있는 호화로운 연미복을 그에게 남긴 것이다. 레오니다스는 유대인 친구가 유증해 준 연미복을 얻은 직후, 순전히 우연으로 빈에서 가장 성대한 무도회의 입장권을 선물 받는다. 이후 수많은 초대장을 받으며 무도회를 주름잡게 된 그는 전 세계의 대도시마다 지점을 두고 있는 백화점 재벌의 외동딸과 결혼하게 된다. 레오니다스는 유대인 의사의 호의로 생존한 다음, 유대인 친구가 선사한 유품의 도움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것이다.

결혼 한지 십삼 개월째 되던 서른한 살 때 하이델베르크로 장기 출장을 갔던 레오니다스는 그곳의 대학생 하숙집에서 철학과 학생이 되어 있는 베라와 만나게 된다. 자신의 결혼을 숨긴 채 6주간 베라의 몸과 마음을 훔친 그는 기차역에서 “내 생명. 두 주만 참아 그러면 내가 데리러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빈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는다. 레오니다스는 아내 덕분으로 여유만만하게 누리고 즐기는 “재산의 상실을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워”하면서 기생 계급에 안주하기로 했고, 베라는 자신의 실수를 감내하면서 혼자 힘으로 철학 교수가 된다. 이 소설이 반유대주의자들의 모함을 전복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뜻에서다.

많은 사람들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인이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교양인, 2010)는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에 빠지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유럽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린 도시의 하나였던 빈”에서 청년기를 보냈던 사실을 꼽는다. 여러 증언은 히틀러가 빈에서 보낸 5년 동안, 그의 생계를 도와준 사람이 거의 유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조잡한 건축화를 구매해준 업자도 유대인, 그가 3년 동안이나 묶었던 독신자 수용소의 운영비도 유대인 독지가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1938년 4월 10일, 오스트리아 국민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에 병합되는 것을 묻는 찬반 국민투표에서 99.7%의 찬성표를 쏟아냈다.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약소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교전을 벌이고 그보다 더 작은 스위스가 일전을 각오한 데 반해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과의 합병을 환영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유대인 핍박과 학살에 보인 적극성은 나치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전후 동서 냉전이 본격화되자 미국과 서방은 오스트리아를 꽉 붙잡고 싶어 했다. 1948년에 실행된 승전국의 사면정책은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나치에 협력했던 원죄를 빠르게 잊게 해주었고, 오스트리아인들은 히틀러를 환영했던 추잡한 과거를 부인하면서 자신들도 프랑스나 폴란드처럼 독일에 점령당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치의 첫 번째 피해자’라는 기만적인 알리바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독일에서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남미로 가는 도중에 베라가 레오니다스를 찾아온 것은, 나치에게 아버지를 잃어버린 어느 유대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과연 레오니다스는 이 임무를 신중히 도맡을 수 있을까.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프란츠 베르펠은 오스트리아 출신 아내와 함께 빈에서 살다가, 나치를 피해 미국 망명길에 나선 1941년부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프라하 시절, 그는 카프카와 깊은 교분을 쌓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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