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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기본소득 논의

입력
2016.06.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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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국민투표 계기로 큰 관심

반대론 대부분이 헛다리 짚었다면

찬성론은 구체적 조건을 외면했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호소하는 포스터 앞을 지나 시내버스에 오르는 스위스 시민들. 연합뉴스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호소하는 포스터 앞을 지나 시내버스에 오르는 스위스 시민들. 연합뉴스

지난 5일 스위스 국민투표를 계기로 기본소득(Basic Income) 보장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스위스 국민 76.7%의 반대를 ‘복지 포퓰리즘 거부’로 보는 반대론, 궁극적 사회보장 및 경제활성화 방안으로 국민투표에까지 이른 것을 부러워하는 찬성론이 팽팽하다.

반대론은 기본소득을 전형적 대중영합이라고 본다. 나라 살림을 빚더미에 올리고, 근로의욕을 저하시켜 생산성만 더욱 떨어뜨릴 재앙으로 여긴다. 기본소득 논의를 전통적으로 좌파가 주도한 데 따른 본능적 거부감도 작용했음직하다.

이런 거부감은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구체적 기본소득 제안은 토마스 페인의 소책자 <농지 정의(Agrarian Justice, 1979년)>에서 원형을 찾는 게 일반적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영국의 왕립ㆍ국유 토지 불하에 맞춘 새로운 농지세 도입을 제안했다. 불하된 토지가 상속될 때마다 10% 이상의 농지세를 부과해 얻은 돈을 땅 없는 사람과 고령자, 장애인 등에 주자는 주장이었다. 연간 570만 파운드의 세수 증대가 추정됐다. 50세 이상 모든 국민에 연간 10파운드, 성인(당시 21세)이 되는 모든 국민에 생애 한 차례 15파운드, 나머지는 장애인 연금에 쓰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영국 농업노동자 주급이 9실링, 연봉이 23파운드였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그것이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기본소득(UBI),‘사회적 배당(Social Dividend)’의 역사적 뿌리다.

더욱이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도 전제 조건만 달랐지, 기본소득 자체는 수긍한 지 오래다. 신자유주의의 기수인 밀튼 프리드먼이 누진세 철폐를 전제로 ‘마이너스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제시한 게 좋은 예다. 실제로 유사한 제도가 1960ㆍ7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실험됐고, 알래스카주는 지금도 모든 주민(州民)에 연 1,000~2,000달러를 준다.

숫자의 마술이 스위스의 기본소득(안)의 대중영합 색채를 부각한 측면도 있다. 스위스의 기본소득 제안은 성인은 월 2,500 스위스프랑, 미성년(18세 이하)은 그 4분의 1을 주는 내용이다. 한화로 각각 월 300만, 75만원쯤 된다. 그런데 지난해 스위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만2,177달러로 한국(2만 7,512달러)의 3배이고, 물가도 그런 수준임을 감안해야한다. 체감하기 쉽게 국내 상황에 대입하면 19세 이상 성인에 월 100만원, 18세 이하에는 월 25만원씩이다. 미성년 자녀가 둘인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250만원인데, 올해 최저생계비 175만 6,000원과 큰 차이가 없다. 이에 만족해 일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기본소득은 다른 모든 사회복지 지출의 폐지가 전제다. 기초연금과 보육료, 의료급여 등을 모두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액수다. 아울러 기본소득 이외의 추가 소득에 예외 없이 세금을 매긴다면 어지간한 중위 소득자도 환영할 수 없다.

일방적 찬성론으로 기울기도 어렵다. 모든 사람에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 주자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또 기본소득 보장이 저소득층의 소비성향에 비추어 총수요를 늘리고, 장기적으로 인공지능(AI)의 의한 노동 대체가 빚을 실업사태나 청년 실업의 해결책일 수 있다. 그에 따른 복지행정 비용 감축과 세수 증대 효과도 기대된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현실조건을 외면한 결과다. 진정한 기본소득은 최저생계비를 넘는 수준에서 결정되게 마련이다. 지난해 1월 기준 한국 인구는 19세 이상이 약 4,146만, 18세 이하가 987만 명이다. 따라서 성인과 미성년에 각각 월 100만ㆍ25만원만 지급해도 월 43조9,000억, 연 527조원이 든다. 소비 진작과 세수 증대, 행정기구 감축 등의 효과를 감안해도 현재의 경제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모처럼 활발해진 논의를, 찬반 한쪽에 성급히 기울지 말고 진지하게 끌어가야 한다. 어쩌면 곳곳으로 꽉 막힌 한국사회의 새로운 숨통일 수도 있으니.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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