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들을 위한 잡지가 새롭게 만들어져 마련한 창간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 잡지에 글을 쓰거나 평소에 육아에 관심이 많은 아빠들이 모였는데 나도 한 꼭지를 쓰게 되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잡지 발행인은 본인 역시 한 사람의 아빠로서 삶과 일의 균형을 잘 잡아가고 있는 아빠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해 이 잡지를 만들게 되었다고 창간의 변을 밝혔다. 그날 모임에는 책에 소개된 딸과 함께 주말이면 캠핑을 떠나는 아빠, 아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주는 아빠, 아이에게 직접 스케이트보드를 만들어 주는 아빠, 놀이터 디자이너가 되어 직접 놀이터를 만든 아빠 등 재미있는 아빠들이 대거 참석했다. 술 한잔 들어가지 않았는데 모처럼의 아빠 모임이 다들 반가웠는지 늦은 밤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이런 잡지와 행사가 있다는 것을 S를 통해 알게 되었다. S는 이 잡지를 기획한 능력 있는 콘텐츠 디렉터이자 두 아이의 엄마다. 나는 그날 S가 창간 파티에 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다. 백일밖에 되지 않은 둘째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S가 행사가 거의 끝나갈 때 모습을 보였다. 아픈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후, 몇 사람이 둘러앉아 잡지에 대한 감상을 나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S가 전해준 남편의 감상이었다. S의 남편은 이 잡지에서 위화감이 든다고 했다. 즉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뜻이었다.

S의 남편은 잡지에 소개된 아빠 중에 일반적인 회사를 다니며 월급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이와 주말마다 캠핑을 가려면 주말 근무가 없고, 캠핑 장비에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지 않아? 아이 노래를 만드는 아빠는 프리랜서 아냐? 아이에게 스케이트보드를 만들어주는 아빠는 자영업자잖아? 늘 경제적으로, 시간상으로 여유가 없는 보통의 아빠들이 이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계속된 질문. “아이가 아픈데 그런 모임에 꼭 나가야 해? 그런 게 일과 삶의 균형이야? 거기에 모여 있는 아빠들은 오늘 아이 안 봐?” S의 남편이 한 말에 공감이 갔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목표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엄마들이 아닌) 아빠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현실 아닌가.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한 장면. 방송화면 캡처.

육아 예능을 봐도 그렇다. 방송 속 연예인 가정은 모두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엄마 아빠가 모두 있는 소위 ‘정상 가정’이지만, 현실 속 가정은 교육비와 생활비로 늘 쪼들리고 엄마나 아빠 둘 중 하나는 없는 경우도 많다. 육아 예능에서 아빠 육아는 여행을 가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는 놀이처럼 비치지만, 보통의 엄마들에게 육아는 고단한 매일의 노동에 더 가깝다.

장모와 연예인 사위가 옥신각신하는 프로그램은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의 불평등한 가부장적 권력관계를 은폐시킨다. 연예인이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는 군대 예능에서는 그보다 더 혹독한 내무반 생활에서 후임병들이 겪는 모멸감은 은폐된다. 마찬가지로 육아 예능은 고되기 짝이 없는 현실의 육아를, 연예인 아빠는 늘 쪼들리는 현실의 아빠를, 아빠 육아는 노동에 다름없는 엄마 육아를 은폐시키는 것이 아닐까. 집으로 가는 길에 S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 이중적인 마음이 들어 좀 힘들었어요”.

‘균형’은 권력을 가진 자의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균형 대신 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그래서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던 것은 집에서 아픈 아이를 돌보는 S의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과 육아의 균형조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내 삶은 늘 뭔가 엉망진창인데, 육아 예능에 나오는 연예인 아빠들은 어찌 그리 균형을 잘 잡았을까. 볼 때마다 비애감이 든다.

권영민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저자ㆍ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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