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발레리 스토리

A6 도로의 살인 사건

데이트하던 남녀에 총기 난사

피해 남성은 그 자리에서 사망

불륜관계 여성은 극적으로 구조

용의자 확정에는 증언만

사건 두 달 지나고 용의자 체포

생존자 증언이 유죄 결정적

재심 청원에도 판결 6주 만에 사형

‘무죄’ 캠페인 난무, 또 다른 비극

“수사ㆍ판결 잘못됐다” 주장 속출

피해자, 인터뷰 거부 ‘위엄있는 침묵’

사건 40년 만에 최종 유죄 확정

22세의 발레리 스토리는 강간에 총질까지 당해 평생 중증 장애인으로 살았고, 범인을 잘못 지목해 무고한 이를 사형당하게 했다는 시민들의 집요한 의심과 원망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는 솟구치는 울분과도 싸워야 했을 것이다. Truejustice.org에서.

1961년 8월 22일 밤 9시, 발레리 스토리(Valerie Storie)와 마이클 그렉스텐(Michael Gregsten)은 영국 버킹엄셔 도니 리치의 한 옥수수 밭 근처에 차를 세우고 데이트를 하다 복면을 쓴 강도에게 납치 당했다. 범인은 권총으로 그렉스텐을 위협해 4시간여 동안 런던 북부를 쏘다니게 했고, 다음날 새벽 1시 30분 인적 없는 A6번 도로변에 차를 세우게 한 뒤 그렉스텐을 살해하고 스토리를 강간했다. 차를 빼앗아 도주하기 직전 범인은 스토리에게도 총을, 실탄이 떨어지자 탄창까지 바꿔가며 7발이나 난사했다. 가슴과 목 등 5발을 맞은 스토리는 다음날 새벽 기적적으로 살아 한 농부의 도움으로 병원에 후송됐다. 그는 척수를 다쳐 상반신 일부와 하반신이 마비됐다. 스토리는 미혼의 22세,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그렉스텐은 36세였다.

참극은 끝난 게 아니었다. ‘A6 살인’으로 불리는 저 사건이 영국 형사사법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사건이 되어가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세월이 이후 4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 세월의 최대 희생자이기도 했던 발레리 스토리가 지난 3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사건 약 두 달 뒤 25세 용의자 제임스 핸래티(James Hanratty)가 체포됐다. 사건 직후 범행에 사용된 총기와 빈 탄창이 각각 런던의 한 시내버스와 호텔에서 발견됐지만 지문은 없었다. 그런데 탄창이 발견되기 전날 그 호텔에 가명으로 묵었던 이가 절도 등 자잘한 범죄 전과 4범의 핸래티였다. 경찰은 스토리의 범인 식별 절차(Identity Parade)에서 용의자들에게 한 마디씩을 하게 했다. 그렉스텐을 살해한 뒤 “이 나쁜 놈, 왜?”라고 절규하는 스토리에게 범인이 했다는 말, “조용히 안 해? 나 나쁜 놈(finking)이야”였다. 런던 토박이 특유의 말투와 차가운 음성, 복면 위로 희뜩이던 파랗고 커다란 눈동자를, 스토리는 기억한다고 말했다. 스토리는 핸래티를 범인이라고 두 번 세 번 단언했다.

경찰 조사에서 핸래티는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못했고, 재판 도중 알리바이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물론 그에게는 뚜렷한 동기가 없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렉스텐의 소형차(56년형 모리스 마이너)를 노리지 않았을 테고, 강간을 의도했다면 그렇게 오래 그들과 함께 머물렀을 리 없다는 게 변호인의 주장이었다. 그에겐 강도 살인은 물론 폭력 관련 전과도 없었다. 경찰은 지문을 비롯한 그 어떤 법의학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피해자 속옷에 묻은 정액검사- DNA 검사기법이 나오기 전이었다- 결과, O형 혈액형은 일치했지만 영국인 40%가 O형이었다. 핸래티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항소마저 기각 당했다. 유죄 판단의 결정적 근거는 휠체어에 앉은 스토리의 확신에 찬 증언이었다.

핸래티의 무죄 주장과 재수사ㆍ재심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벌어졌다. 핸래티 가족과 변호인단을 중심으로 ‘A6 변호 위원회 A6 Defence Committee’가 꾸려졌다. 정치인과 저널리스트, 법 인권운동가들이 거기 가세했다. 존 레논- 오노 요코 부부도 후원금을 냈고, 공개적으로 핸래티 가족을 만나 격려하는 등 캠페인에 힘을 보탰다. 형 집행 정지를 탄원하는 서명에 무려 9만여 명이 서명했다.(텔레그래프, 2012.12.02)

핸래티는 판결 6주 만인 62년 4월 4일 교수형 당했다. 형 집행 전날 가족 면회에서 그는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누명을 벗겨 달라는 거다.(…) 누구도 나에 대해 그릇된 말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했다고, 그의 동생(제임스 핸래티)은 말했다.(BBC, 2002.5.16) 영국 의회가 일반 사범에 대한 사형제를 폐지한 것은 3년 뒤인 1965년, 반역제ㆍ군범죄자 등에 대한 사형제까지 전면 폐지한 건 1998년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비극이 시작됐다. ‘A6 사건’의 수사도 판결도 잘못됐다는 의혹과 주장, 근거들이 잇달아 제기됐다. 범행 직후 핸래티가 피해자 차량을 운전하는 걸 목격했다는 목격자의 재판 증언은 정황상 불가능하다는 게 드러났고, 경찰도 그 사실을 알면서 위증을 묵인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피의자 진술자료- 비록 결정적인 내용은 아니었지만-를 고쳐 쓴 사실도 내무부 형사사건 재심위원회(CCRC)에 의해 밝혀졌다. 2002년 BBC 다큐멘터리 ‘The A6 Murder’에서 변호사 마이클 셰라드(Michael Sherrard, 1928~2012)는 “대중도 속았고, 시스템도 속았고,(…) 핸래티도 속았다. 경찰이 공개하지 않은 사실이 재판에서 모두 공개됐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건의 범인 제임스 핸래티는 1962년 교수형 당했다. 당시 25세. 그는 긴 세월 동안 사형제의 순교자이자 무고한 희생자로 떠받들어졌다. 물론 그는 강간 살인범이었다. 하지만 훗날의 DNA 확증이 40년 전의 정의롭지 않은 수사와 재판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피해자이기는 했다.

앞서 1997년 1월 재심위원회는 A6 사건 재심을 결정했다. 언론은 원심에 “심각한 결함(serious flaws)이 있었다”는 위원회의 판단과 재심 결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그 중 일부는 핸래티의 무죄를 기정사실화했다. 그 해 1월27일자 ‘인디펜던트’의 기사 제목은 ‘그릇된 교수형 Wrongly hanged: Hanratty is found’이었다. 언론의 집요한 인터뷰 요청에 스토리는 침묵을 지켰다.

경찰은 1999년 범행 총기를 쌌던 손수건과 피해자의 증거물 속옷에 남은 정액 DNA를 핸래티 유족의 DNA와 대조했다. ‘PCR(Polymerase chain reaction)’이라는 DNA 복제기법, 즉 극미량의 DNA를 복제해 유의미한 법의학 분석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 갓 도입된 때였다. 분석 결과 법의학팀은 “250만분의 1의 확률로 두 DNA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불신으로 기울어질 대로 기운 대중의 의혹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 항소법원 수석재판부는 2001년 핸래티의 무덤을 열어 본인의 DNA와 대조토록 했다. 역시 일치했다. 법원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핸래티의 유죄가 입증됐다”고 최종 판결했다.

이번에는 증거의 ‘오염 가능성’이 제기됐다. 60년대 초반의 허술했던 증거물 관리ㆍ보존 관행, 현장에서 경찰서로 법의학실로 법원으로 증거물이 오가는 동안 다른 증거물과 부딪쳤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법의학팀은 “만일 증거물이 오염됐다면 총기를 싼 손수건에서 핸래티 외에 ‘진범’의 DNA도 나와야 하지만 거기선 오직 한 사람, 핸래티의 DNA만 검출됐다. 피해자의 속옷에선 단 두 명- 핸래티와 그렉스텐-의 DNA만 나왔다”고 반박했다.

발레리는 핸래티 교수형 직후 한 인터뷰에서 자신과 그렉스텐이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윤리적 지탄도 감당해야 했다. 사진은 1962년 6월의 잡지 ‘Today’사진. Forum.casebook.org에서.

핸래티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던 이들은 물론 대부분 대가 없이 제 돈과 시간을 써가며 그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경찰 사법 시스템의 부실과 나태를 고발하고자 했고, 그들이 믿는 바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다.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 정의 원칙을 그들은 앞세웠다. 적어도 명분은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심(물론 그들에겐 확신)을 의심하지 않았고, 아집과 선의를 혼동했다. 잊힐 만하면 신문ㆍ잡지가 기사를 썼고, 크든 작든 새로운 얘깃거리가 나올 때마다 방송 보도가 이어졌고, 추적 취재를 한 언론인은 나름의 시나리오로 책을 썼다.

스토리는 그 세월을 견뎌야 했다. 대놓고 그를 비난한 이는 많지 않았지만, 공박의 과녁 한가운데에는 늘 그가 있었다. ‘불확실한 기억’에 근거한 ‘섣부른’ 증언으로 무고한 한 남자를 죽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휠체어의 그는 단 한 차례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법원 최종 판결을 보도하며 ‘데일리 메일 온라인’은 스토리가 ‘위엄 있는 침묵(dignified silence)’을 지켰다고 썼다.

발레리 스토리는 1938년 11월 24일 영국 버크셔 슬라우(Slough)에서 태어났다. 55년 고교를 졸업한 뒤 랭글리의 도로조사연구소 연구보조원으로 취직했고, 거기서 유부남이던 과학자 그렉스텐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의 연애는 직장 동료들과 그렉스텐의 아내 재닛이 금세 알아챌 만큼 불 같았지만 재닛은, 텔레그래프가 전한 바 “한 때의 불륜 상대쯤”으로 여겨 남편의 이혼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은, 적어도 스토리에게 그 연애는 진지한 거였다. 그는 훗날 57년 12월의 첫 데이트를 “20년 동안 살면서 경험한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불신과 지탄을 견디며 그는 전 직장에 복귀해 가족을 부양했고, 평생 장애인 이동권 개선 사업에 몰두했다. Forum.casebook.org

스토리는 사건에 따른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사건 10개월 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직장에 복귀했고, 외동딸로서 병든 부모를 경제적으로 부양했다. 그는 1983년 말 은퇴할 때까지 슬라우 지역 교통국 디렉터 겸 총무이사로 일하며 장애인 이동권 개선을 위해 헌신했다. 교통국 전 책임자인 웬디 필드는 “발레리의 과학적 지식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 자신 장애인으로서 의회 회의 때면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 개선책을 앞장서 대변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의 장애인용 개조 차량을 직접 운전하지 못하게 된 뒤로는 버스를 이용하며 대중교통 장애인 편의시설 등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곤 했다”고 말했다. (옵저버, 2016.4.16)

스토리가 인터뷰 요청을 일절 거부한 것은,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소용 없으리라 여겨서였다. 그가 비로소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은 마침내 그의 진실이 다시, 좀 더 진전된 법과 절차 즉 DNA 조사에 의해 확인된 2002년 5월이었다. 62세의 그는 한이라도 풀듯 쌓인 말들을 털어놓았다. “그 날 이후 나는 어깨 아래로 마비된 채 살아왔다.(…) 매 순간 나는 그 (범죄의) 흔적과 더불어 살아야 했다.(…) 그 사이 화날 때가 많았지만 집단적 히스테리아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는 거짓말쟁이로 불려왔다. 내 말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MailOnline, 위 기사)고도 했고, “핸래티가 살아 돌아와 ‘내가 범인’이라고 고백해도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FreeOnlineLibrary.com)이라고도 했다. BBC 다큐멘터리 ‘The A6 Murder’인터뷰에서 스토리는 “나는 늘 핸래티의 유죄를 확신했다. 그는 이 나라의 법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배심원은 그를 유죄로 판단했고, 선고 받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유죄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억울하고 쓰라리지는 않다. 누구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부터 파괴하게 될 것이다”(freeonlinelibrary)라고도 했다. 그 말은 신문과 방송과 책, 때로는 이웃의 어떤 질문과 표정에 분노하는 자신을, 하지만 무기력한 자신을, 다독이려고 속으로 수없이 되뇐 말이었을 것이다.

그렉스텐의 유족도 큰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핸래티의 무죄를 확신했던 이들 중 한 명인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폴 풋(Paul Foot,1937~2004)은 ‘누가 핸래티를 죽였나 Who Killed Hanratty’(1971)라는 책에서 그렉스텐의 아내 재닛이 사건 배후에 있고, 그의 사주를 받고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자는 다른 용의자(피터 알폰(Peter Alphon)였을 것이라 추정했다. 오랜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기도 했던 풋은 영국언론상(1980), 조지오웰저널리즘상(1995) 등을 수상하기도 한 저명 언론인으로, 그는 숨질 때까지 핸래티의 무죄를 믿었다.

사건 당시 2살이었던 피살자의 아들 앤서니 그렉스텐이 풋의 책을 처음 읽은 건 11살 무렵이었다. 2002년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그는 “내 어머니는 그의 야만적 추정의 희생자였다.(…) 어머니는 내가 당신을 의심하는 기미라도 보일까 봐 두려워하며 내 눈치를 보곤 했다”고, “나 역시 위축된 삶(life in the under-class)을 살아야 했다.(…) 내겐 정의가 너무 늦게 실현됐고, 그만큼 오래 오명을 견뎌야 했다”고 말했다. 2002년 BBC 인터뷰에서 그는 “낯선 사람에게 ‘A6 살인사건’의 희생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라. 아마 잠깐 생각한 뒤에 ‘핸래티’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사건 당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던 알폰도 핸래티의 무죄를 밝히려는 이들로부터 집요한 추궁과 회유를 당해야 했다.

핸래티의 유죄가 입증됐다고 해서, 대중의 비이성적 열정에 비수를 들려 준 경찰의 부조리한 수사와 무모한 형 집행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핸래티의 유족도 그 비수의 희생자였다.

스토리는 핸래티 가족을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어느 어머니도 자기 아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살인자에게는 어머니가 있다.(…)그들은 그들이 해야 한다고 여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맹렬한 사형제도 옹호론자였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고, 인터뷰 등으로 번 돈 4만 파운드를 2014년 슬라우 교통국 장애인 지원 사업에 기부했다. 교통국은 그 돈으로 마련한 장애인 버스에 ‘발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