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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로씨’ 사모곡

입력
2016.05.2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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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떠나 보냈다.

우리 평생 해로할 것이라며 핸들 붙잡고 맹세하던 첫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데 기껏 5년도 함께 하지 못했다. 내 손으로 ‘새서방’ 찾아 고이 보내야 했던 이별의 날은 온종일 슬피 울어야만 했다. 아! 2012년 10월 가을 단풍 곱던 그 날이 다시 어른거린다. 설렘 가득한 함박웃음으로 맞이했던 그녀. 끝까지 지켜주겠다던 다짐은 이제 허풍으로 끝나고, 덩그러니 벽장에 들어간 특대형 사이즈 헬멧만 허무해진 심장을 두들기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로씨’. 미국 ‘H’사의 모터바이크 ‘아이언 883’이 그녀의 원래 본명이다.

곤궁한 처지에 사치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내게 주고 싶은 유일한 선물이라는 작심으로 적금 붓고 용돈 아껴 정말이지 어렵게 품에 들인 사랑스런 존재였다. 나는 이름까지 지어둔 채 그녀를 기다렸다. 처음엔 체 게바라의 바이크 ‘포데로사’를 따 ‘로싸’라고 이름 짓고 싶었지만, 어리벙벙한 천성에 가끔 무모하게 내지르는 내 성격이 돈키호테에 훨씬 가까웠기에 그의 늙은 말 ‘로시난테’를 따 ‘로씨’라고 일찌감치 명명해둔 것이다.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바다 건너 도착해 박스와 포장이 벗겨지면서 그 수려한 무광블랙의 자태를 드러내던 첫 대면의 순간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며칠이 지나 내 손에 키가 쥐어지고 첫 시동을 걸었을 때는 숨이 턱 하니 막히기도 했다.

“바등! 바등! 바드드등!!” 인간의 심장박동수와 동일하다는 ‘H’사 특유의 배기음이 나의 심장을 강렬히 휘감아 돌았다. 터프하게 울부짖는 그녀의 음성이 어찌나 심장을 파고드는지 나는 온 세상이 내 것이라도 되는 양 소리 질러 화답했다.

“오지 않는 바람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몸을 달려 맞이하면 그게 바람이니 일어나 달리면 될 일이다. 바람은 거기에 있다!”

어디든 달릴 기세로 ‘로씨’와의 합방을 선포한 그 날 이후 꿈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시샘을 느낀 운명의 장난질인가. 나는 ‘로씨’를 맞이한 지 일주일 만에 ‘또 다른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소신도 없이 그만 또 다른 그녀에게 넋을 잃어버린 나는 ‘로씨’를 차가운 주차장에 처박아 놓고는 매형의 자동차를 장기 임대해 그녀를 ‘모시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그녀의 퇴근길 운전기사를 자처했고, 툭하면 그녀를 옆에 태운 채 물 좋고 산 좋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계절이 몇 바퀴를 돌아갔다. 그 사이 ‘로씨’는 어둡고 침침한 주차장에서 점점 포효를 잃어만 갔다. 가엾은 마음에 가끔 함께 거리를 나서긴 했지만 예의 그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를 잃어가는 로씨를 보면서 나는 한없이 자책감에 시달리며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 결국 또 다른 그녀와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낳은 후로 나는 더 이상 안방에 들어올 일이 없게 된 ‘로씨’를 보며 이제 새로운 삶을 선택할 때가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더 이상 주차장에 놔두기에 로씨는 너무 ‘젊고’ 쌩쌩했기에.

쓸 만한 ‘새서방’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한테나 보내고 싶지는 않았고 따사로이 아껴 줄 건실한 사람이어야 했다. 결국 절친한 지인 중 한 사람이 ‘선정’되었고 그는 날마다 전화 해 빨리 ‘새 장가’를 가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자꾸 뜸을 들이며 로씨와의 이별주간을 보낸 뒤 드디어 찾아온 운명의 날. 헬멧에 가죽장갑까지 온갖 치장을 한 채 찾아온 새서방은 로씨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는 내게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작은 체구의 그를 보면서 내심 타오른 질투심에 한 마디 던지기도 했다. “다리는 닿겠수?”

“바등! 바등! 바드등!”

로씨는 그 동안 쌓인 서운함을 담아 마지막으로 울부짖고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입을 틀어막고 무너지는 억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요즘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로씨’가 새서방과 너무나 금슬 좋게 지내고 있다며 이제라도 자기를 놓아준 ‘전서방’에게 몹시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가끔 홀로 주차장에 내려가 텅 빈 자리를 바라보곤 한다. 로씨와의 짧은 인연에 곡소리를 내어 울고도 싶지만 아내와 딸아이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며 이내 맘을 고쳐먹는다. 며칠 전 개설해 장롱 속에 숨겨 둔 3년짜리 적금통장을 생각하면 절로 힘이 나기도 한다. 아내에게 들키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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