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지 않으면 잊힌다. 여행작가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바람이 스치는 순간에도 적고 찍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지들은 이런 내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첫번째 여행지는 미국 텍사스에 있는 식스플로어 박물관(Sixth floor museum)이다. 식스플로어 박물관은 미국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생애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박물관의 초점은 1964년 11월 11일에 맞춰져 있었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식스플로어 박물관은 텍사스주 교과서 보관소 건물 6층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 암살자 하비 오즈왈드가 총을 쏜 곳이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케네디를 회상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피격 당시를 초 단위로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동영상을 프레임별로 캡처해, 케네디의 자동차 퍼레이드 리무진이 엘름 스트리트를 돌아 딜레이 프라자로 향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시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 동영상을 찍은 자푸르더는 댈러스의 평범한 시민이었다. 대통령을 보러 나왔다가 홈 무비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었는데, 이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물이 된 것이다. 그가 사용한 카메라는 414 PD 벨&하웰 주매틱 디렉터 시리즈로, 자푸르더는 486프레임의 동영상을 촬영했다. 이 동영상은 케네디와 관련된 영화와 뉴스, 각종 자료에 인용되어 왔다. 1994년 미국의회 도서관에서는 이 필름 영상을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유로 영구보존 자료로 채택하기도 했다. 자푸르더는 시민 기자의 조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우연한 기록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4년 11월 11일. 충남 공주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을 위한 조사팀이 첫 삽을 떴다. 석장리에서 구석기 시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연세대 손보기 교수팀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년에 걸쳐 발굴작업을 펼친 끝에 우리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1974년 초등교 교과서에 구석기시대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석장리 유적 발굴 덕분이었다.

구석기 유적을 보기 위해 찾은 석장리박물관. 유물보다 박물관에서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한 권의 노트였다. 노트에는 발굴할 때의 순간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연필로 주먹도끼를 스케치한 그림, 발굴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점심식사를 한 식당과 메뉴, 가격까지 적혀 있었다. 한 장의 흑백사진도 발길을 붙잡았다. 손보기 선생이 책상도 없이 발굴현장에서 고개를 노트에 박고 뭔가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적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발굴이 가능했겠느냐는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녔는데 답은 손보기 선생의 끊임없는 기록에 있었다. 그의 기록에 대한 열정은 숨어있던 한반도의 구석기를 우리 앞에 보여준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10일간 광주는 불처럼 타올랐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민주화운동 제36주기를 앞두고 옛 가톨릭센터에 둥지를 튼 5ㆍ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을 찾았다. 기록관에 전시된 자료로 더듬어 본 광주는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다. 중국 난징(南京) 대학살기념관과 하얼빈(哈爾濱) 731부대가 떠올랐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초등학생의 일기부터 긴박감이 전해지는 취재기자의 수첩, 외국 기자들이 포착한 사진과 빨간펜으로 편집 당한 신문까지 접하지 못했던 기록들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이 기록들은 당시의 절박감과 공포를 피부로 느끼게 해줬다.

이 같은 기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5·18 민주화운동의 기록들은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의 인권활동가와 학자들은 기록물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본다. 이 기록물들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발전이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 한 달간 돌아본 식스플로어박물관과 석장리박물관, 그리고 민주화운동 기록관을 통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본다. 기록은 힘이 세다. 오늘도 길 위에서 부지런히 펜을 옮겨 본다.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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