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 2030] 베이퍼 웨이브 유행

밀레니얼 세대 어릴 적 경험한
1980, 90년대 음악ㆍ영상 짜깁기
알록달록 ‘의도적 조악함’ 특징
유튜브ㆍ인스타로 퍼지며 유행
아이유 등 인기 뮤지션도 활용
새로운 문화 플랫폼 될지 관심
검정치마 ‘내 고향 서울엔’ 뮤직비디오 캡처

#어랏, 이게 뭐야 싶다. 뮤지션 ‘검정치마’는 ‘내 고향 서울엔’이란 제목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타향살이의 대표도시 서울을 ‘고향’으로 지칭한 이 뮤직비디오는 세련됨과는 척을 졌다. 과거 서울의 이미지들과 지저분한 화질이 촌스럽게 뒤섞인, 딱 1990년대 노래방 화면 수준의 영상이었다. 그런데, 이거 자꾸 끌린다. 촌스럽다고 치워버리기엔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한 1980~90년대의 이미지들이 제법 보인다. 우루사는 아예 과거 그 시절의 광고를 그대로 틀고, 르까프 광고는 배우 이서진이 등장하더니 1980년대 풍으로 찍었다. 여기까지야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들이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 인기를 타고 내놓은 복고 바람이라고 할 법도 하다.

아이유 ‘스물 셋’ 뮤직비디오 캡처
오혁&프라이머리 'Island'뮤직비디오 캡처
씨엘&Dplo 'Doctor Pepper'앨범 자켓

###가만, 그러고 보니 이들만이 아니다. 주류 무대에 서는 음악인이랄 수 있는 아이유의 뮤직비디오 ‘스물셋’, 오혁과 프라이머리의 뮤직비디오 ‘Island(아일랜드)’도 비슷한 느낌이다. 하이테크가 아닌 로우테크 바람, 그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구닥다리 이미지’들의 향연. 세상은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 때문에 떠들썩한데,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미지들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SNS 가운데 사진 이미지가 가장 많은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가면 이 유행은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자칭 타칭 ‘힙’하다는 사람들의 타임라인에서는 하나씩은 꼭 보이는 게 바로 이 ‘촌스럽고 괴상한’ 이미지의 조합이다. 아주 마구잡이는 아니고 나름 특징들이 있다.

알록달록 생생한 색채에 1980, 90년대의 광고들이 많이 사용된다. 그리스 조각의 두상이 등장하질 않나, 돌고래, 피라미드, 해변 등 다소 생뚱 맞은 이미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금 보면 어설퍼 보이는 초창기의 3D그래픽과 패미컴(패밀리 컴퓨터ㆍ초창기 게임용 컴퓨터)이나 4, 5세대 시절 콘솔게임도 등장한다. 구식 비디오 테이프에서나 보던 화면상의 긁힘, 무엇보다 1990년대 PC, 윈도 95 전후와 90년대에 나온 Mac OS를 비튼 이미지, 80년대나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사이버펑크 등이 이 조류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들이다.

인스타그램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베이퍼 웨이브 이미지. 비틀즈의 유명한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의 표지를 응용했다. 아이디 ‘@bxller’이 만들었다.

이 난잡해 보이는 이미지에도 이름이 있다. 바로 ‘베이퍼 웨이브(Vapor Wave)’, 직역하자면 ‘수증기 유행’이다. 수증기처럼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뜻일까? 베이퍼 웨이브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문화웹진 피카소에 따르면 첫 번째 가능성은 ‘베이퍼웨어(Vaporware)’라는 단어에 있다. 베이퍼웨어란 IT 관련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회사에서 별로 퀄리티가 좋지 않은 상품을 대박 상품인 것처럼 속여서 발표하거나, 신제품 발표 일자를 공표해놓고 아예 제품을 내놓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소비자들을 의도적으로 속인다는 쪽보다는 경쟁사들의 힘을 낭비하게 하는, 일종의 헛다리 짚게 만들기 전략이다. 구글이 이런 전략을 써서 경쟁 IT 업체들의 진을 빼놓는다고 해서 ‘구글의 농담’이라 불리기도 한다. 진지함의 탈을 쓴 유머다.

음악 쪽에서 스크류라는 음성 편집 기법을 이용해 마치 수증기(vapor) 가득한 사우나실 안에 있는 것 같은 환각적인 느낌의 음을 만들어내 이 음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든다든지, 기존 음악 장르인 칠웨이브(Chillwaveㆍ몽롱한 사운드와 단순한 멜로디 중심으로 2000년대 유행한 음악 조류)를 패러디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어원은 그렇다 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절망시킬 정도로 기술이 정점으로 치달아가는 2016년, 왜 이처럼 이미지들은 오히려 과거회귀하고 있는 걸까? 왜 사람들은 다분히 의도된 ‘로우테크’ 이미지들을 호명하고 즐기고 있는 걸까?

우선 1980~2000년에 출생한 이른바 밀레니얼(Millennial) 세대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들은 청소년 때부터 인터넷을 사용했고, 모바일ㆍSNS 등 정보기술에 능통하다. 윈도를 처음 켤 때 나는 부팅 소리, 조잡한 폰트 같은 것에 향수를 느낀다. 베이퍼 웨이브의 부상은 무엇보다 지금이 이 인터넷 세대들이 문화의 중심축에 놓이는 시기라는 점과 관계가 있다. 누구나 유튜버, 블로거, 인스타그래머로 1인 창작자가 될 수 있는 디지털 유목민 세대는, 무한한 이미지의 바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건져 올린다. 건져 올린 것들을 이것저것 섞어 잡탕을 끓이면 나름대로 독특한 미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주 먼 과거가 아닌데도 무척 낯설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미지들에서, 기술 발전 속도를 체감하고 쾌감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베이퍼 웨이브의 탄생은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10년대 초 등장한 실험음악계의 문화사조 중 하나인 ‘시펑크’가 이 조류의 어머니 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시펑크란 90년대 초창기 하우스 음악과 오래된 팝 음악, 트랩 랩 등을 샘플링으로 떼어 내 기이하게 변형해서 짜깁기한 음악을 일컫는다. 이 시펑크가 사멸하는 과정에서 시펑크 특유의 ‘복고적 키치’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 바로 베이퍼 웨이브라고 할 수 있다. 즉, 별 볼일 없다고 여겨졌던 1980, 90년대 일반 대중 취향의 음악, 혹은 쇼핑몰이나 엘리베이터 등에서 별 의미 없이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짜집기해서 ‘쿨’해 보이게 한 것이 바로 베이퍼웨이브인 셈이다.

샘플링의 방식을 통해 과거에 촌스럽다고 여겨졌던 음악들을 재창조하고 다시 쿨한 것으로 만들어냈으니,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1990년대 당시 유행했던 이미지들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음악을 넘어 철학적, 미학적 움직임이 된 것이다. 음악과 미술이 결합하기 가장 좋은 방식인 뮤직비디오나 패션 필름 등에서 이러한 베이퍼 웨이브의 미학을 적극 쓰기 시작했다. 이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타고 퍼져나갔고 ‘힙’하다는 음악인이나 유명인들은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보는 유행이 됐다.

지금 보면 한없이 촌스러운 연출기법의 과거 영화, 광고 영상 이미지를 가져온다. 고의적으로 아마추어처럼 연출한 3D 이미지, 조악한 포토숍 기술들을 조잡하게 섞어놓는다. 거기에 알록달록한 색감을 덧칠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의도된 조악함’이 ‘아방가르드’로 받아들여지도록 한 것이다.

전문가들 역시 이러한 베이퍼 웨이브 이미지를 꺼리지 않는다. 그래픽 디자이너 이지수(여ㆍ27)씨는 작업할 때 이런 베이퍼 웨이브의 이미지를 자주 쓴다. 이씨는 “이전에 미니멀리즘에서 보였던 과도하게 정제된 세련미의 경우 디자인 하는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끼기기도 했고 미니멀리즘은 쉬워 보여도 철저히 이론대로 정렬해야 하기 때문에 피로도가 높다”면서 “그에 반해 베이퍼 웨이브는 누가 봐도 뭔가 언밸런스하기 때문에 누군가 와! 이거 쿨하다! 하면 그럴 수도 있구나 싶어지고 나름의 ‘예술성’이 생겨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괴짜 같은 느낌이 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디자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뜻이다.

검정치마 ‘내 고향 서울엔’ 뮤직비디오를 만든 비주얼 아티스트 CJ Jeong 역시 “창작자들로서는 베이퍼 웨이브를 꼭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하진 않는다”면서 “다만 작업하기 쉬우면서도 좀 더 효과적인 방식을 고려하다 보면 베이퍼 웨이브 같은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비디오, 인터넷, MTV를 즐기며 자라온 세대는 영상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다르다”면서 “특히 요즘처럼 혼자서도 영상 작업을 할 수 있는 시대에는 돈을 크게 들이지 않고 음악과 영상을 만들다 보니 더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이를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이퍼 웨이브란 기술이 발달할수록 반작용처럼 계속 등장할 유행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음악전문웹진 ‘weiv’ 정구원 편집장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베이퍼 웨이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 편집장은 “재미에서 출발한 하위문화이지만 소모되고 소비되어 사라질 이미지를 가지고 새로운 음악이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속성이 있다”며 “이를 곱씹어볼 만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베이퍼 웨이브는 아티스트나 작품의 이름, 작업 자체가 장르의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상징과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 아티스트나 작품 이름을 문장을 변형한 형태로 사용해 얼른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복고적이거나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철 지난 이미지 역시 자본주의적 변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정 편집장은 한국에서는 아직 소수의 음악인들 정도가 시도하고 있을 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라고 말하기엔 힘이 약하다고 평하면서도, 그렇기에 잔재미는 주는 요소로서 베이퍼 웨이브에 대한 시도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베이퍼 웨이브는 기술 발달에 따른 반작용으로 등장한 단순한 키치적 유행일까, 아니면 새로운 문화적 플랫폼일까. 이런 걸 따지기 전에 먼저 한 번 즐겨보기를 권하고 싶다. 해보면 어떤 매력이 있는지 바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퍼 웨이브 이미지는 아이폰용 스마트폰 앱 ‘cybr.fm’과 ‘leanified’ 같은 것을 통해 간단하게 만들어볼 수도 있다. 초보자도 하나 만드는데 5~10분이면 충분하다.

한소범 인턴기자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어플리케이션 cybr.fm을 이용해 기자가 직접 '베이퍼 웨이브'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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