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욱의 춘풍예찬(11) : 교과서 속의 오태석

국정 교과서란 어떻게 보면 한 국민의 집단 기억 형식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수준의 완성품들에게만 허여되는 영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대표적 현역 극작-연출가 오태석 선생의 무대 가운데 교과서에 수록된 대본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은 그가 이룩한 세계의 정수를 추려내는 것과 얼추 같을 것이다. 가장 상식적 의미에서.

그러나 문제는, 오태석 선생의 작품은 그 원작자가 휘두르는 칼춤을 피할 길 없다는 점이다. 너덜해진 대본 뭉치를 들고 연습장이든, 공연장이든 고치고 또 고쳐가는 도저한 천석고황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정 교과서 집필진이 심모원려 끝에 교과서 속으로 고정한 대본들은 말하자면 스탠더드 오태석이 아닐까. 이제는 참으로 고칠 데 없는, 말하자면 완성본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그의 중 국정 교과서 수록작은 ‘춘풍의 처’, ‘자전거’, ‘태’ 등 3편이다.

‘춘풍의 처’의 대중성

1975년 초연된 ‘춘풍의 처’가 이후 그려온 궤적은 일반과 소통하려는 선생의 의도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극장의 규모에 따라 아주 작은 실내악적 무대에서 대규모 관현악적 무대까지, 선생은 떡 주무르듯 ‘처’를 다듬어 왔다. 그 작업의 주춧돌은 물론 대본이다. 단, 불변의 진리로서가 아니라 동시대와 긴밀히 교호하는 생명체로서.

오태석 작, 연출 '춘풍의 처'. 목화레퍼토리컴퍼니제공

“초연본에서의 과도한 비약과 생략이 순화되어 오는 과정이었다”고 그는 그 길을 요약한다.. 미학적으로는 손해를 봐도 전달력 향상을 위해 꾸준히 걸어왔다는 것이다. 민족의 얼을 언어라 한다면 우리 언어는 참으로 기구한 팔자다. 그에 의하면 한국어의 비극은 구한말, 식민 통치, 군정의 숨가쁜 역사 등을 우리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데서 비롯했다. 그는 그 비극의 치유책으로서 언어는 현재 사람들에게 ‘친절’해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즉 관객과의 타협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무게감, 압축력은 떨어지더라도 쉬운 말로, 즉 현대어로 바꾼다는 것이, 그러나 한문투의 고사는 못 알아들어도 쓴다는 원칙 등이 그를 위한 작업의 실제로 세워졌다. 진본 혹은 원본임의 확증으로서.

그를 해결항 무대 어법으로서 전통 연희 연희 양식이 그를 구원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산대와 탈춤 속의 작은 에피소드를 추려 연희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가능한 한 사자성어를 차사(借辭)한다, 3-4·4-4조를 견지한다 ; 이후 셰익스피어 번안 작업에서도 관철된 원칙이다.

또 현재를 겨냥하는 ‘자전거’

‘자전거’는 단절된 현대사의 기억을 끌어안은 결과다. “예전에는 집단 동냥 등의 행태를 통해 문둥이들과 쉽게 부딪쳤다. 문둥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보통사람들의 두려움은 막연했지만 엄청난 실체였다. 낯설기만 한 문둥이란 존재에 대한 객석의 느낌, 거기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려 애썼다.” 실체보다 감각에 기대야 했으므로 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현재 오 선생의 입장은 보다 근본주의적 입장이다.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으로 문둥이들의 은어를 쓰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남사당에게 은어가 있듯 문둥이들에게도 그들만의 은어가 있다. 그 말맛을 제대로 못 나타내 항상 아쉬웠다.” 문둥이 은어 버전으로 ‘자전거’를 꼭 해보고 싶다고 욕망하는 이유다. “한하운의 시 등에서 유추해서 하고 싶다. 단원들을 시켜서라도, 소록도 같은 데 가서 그들의 생생한 언어를 채록하고 싶다.” 이어 덧붙이는데, “대단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2004년 무대에 오른 연극 자전거의 한 장면. 목화레퍼토리컴퍼니제공
그러나 보다 텍스트 속으로, ‘태’

한편 ‘태’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정사에 입각한 무대임에도 TV의 사극에서 흔히 보는 상투적 옛말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사극에서 흔히 봐 온 상투적 행태(클리셰)가 관객들이 본질에 다가서게 하는 데 방해하기만 할 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더 이상 우화의 공간이 아니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현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라는 판단. 삼족이 멸해지는 벌을 당한 사육신들이 목숨 걸고 지킨 군신유의라는 덕목은 당연히 현재적 논리와 충돌한다. “단종의 목숨을 두고 벌어지는 찬반의 시각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국가의 위기를 맞아서 첨예한 대립을 빚는 명분과 실제의 충돌상을 명징하게 부각시켰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논리에 생명을 부여한 셈이다.

“생명이란 테마로 모든 것이 집중된다, 생명을 향해 모든 것이 질주하게 만들었다, 객석에 생명의 위대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유신 치하의 74년에 씌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목이 떨어지던 그 시절, 반성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언제나 개으른 법.

그의 무대는 언제나 현재를 겨냥한다. 상징과 은유, 보다 직접적으로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생략과 비약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더라도 오태석 선생은 현실적이기를 멈출 수 없다. “인간이 생명체로서의 당당함을 잊어버린 시대다. 내가 대단한 인물인만큼 상대도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나를 집단 속의 분자로만 여기지 말고 당당한 개체로서 자기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연세대 철학과 다닐 때 베르그송의 생명 철학에 심취했던 것일까?

“군정 때의 생명의 가치가 절실했듯, 이 새대는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절박하게 요구한다.” 저 말을 선생은 이렇게 번역해 주었다. “셰익스피어가 450년이 지나도 생명력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태’에서는 사회 일반이 쓰는 시쳇말은 빼고 한문투성이의 죽은 언어만 쓰게 해, 역(逆으)로 생명을 강조한 것이다.”

모노드라마에의 꿈, 오태석 언어의 결정체

그렇다면 언어의 밀고 당기는 힘으로 무대가 진행되는 모노드라마를 통해 오태석 연극 언어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선생의 일인극은 ‘약장사’, ‘롤라 스케이트를 탄 오뚜기’, ‘육교 위의 유모차’ 등 3편이다.

그의 일인극은 언어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인극, 즉 판소리를 전범으로 한다. 연희하는 사람마다 다른 우리말의 속성, 즉 개인적으로 큰 편차를 갖는 입심이란 문제에 대해 민감하다. “판소리에서 아니리의 화려함을 보자. 고수는 3명 바뀌지만, 9시간을 혼자서 아니리로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말의 폭과 깊이가 받쳐주기 때문이다.”.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판소리를) 알아듣는 관객, 부체와 수건이라는 말이다. 열린 형식으로서의 판소리에 대한 믿음은 새로운 창작 무대로 이어진다.

오는 10월 초연을 목표로 다듬어 지고 있는, 얼추 70번째의 작품 ‘도토리’. 인간 대 자연이라는 대립항을 현재적 의미로 밀어붙인다. 부쩍 늘어난 산행 인구가 산의 도토리를 다 주워오는 바람에 먹이를 잃은 다람쥐, 청설모를 주인공으로 한다. “인간이 그냥 두면 그들은 잘 산다. 인간은 끼어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산행한다며 그들의 도토리까지 빼어가지 않느냐?”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그린(green) 연극 ‘내 사랑 DMZ’의 연장선이다.

70대 중반의 이 현역 연출·극작가는 말했다. “손자 뻘 제자들에 둘러싸여 살지만 너무 바쁘게 다 보니 그들(젊은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못해 아쉽다.” 매우 비효율적인 연극 제작 방식, 동인제를 고집하는 이상 사실 어쩔 수 없는 문제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감옥 소장이라고 했다. “목화 같은 동인제는 원래 하루 24시간 극단만을 생각하는 사란들의 모임이다. 오전에는 집안 일 같은 개인적 일을 보지만 오후 1시부터 지하철 끊기는 시간까지, 허구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서 온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일들을)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

한국일보 편집위원 a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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