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 때 나를 학교에 보내셨다. 덩치는 컸지만 용기는 부족했던 나를 학교에 보내놓고 어머니는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 때는 몰랐는데 학교에 자주 드나 드신 것을 못마땅해 하셨던 아버지와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공터에는 늘 아이들이 모여 딱지를 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린 내가 행여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집에 있는 가장 좋은 질의 종이를 접어 딱지를 만들어주셨다. 은행에서 나눠주는 빳빳한 달력 종이는 힘도 좋고, 쉽게 터지지 않아 딱지판에서 귀한 몸이었다. 달력을 모두 딱지로 만들어 신발가방에 챙겨 넣은 후 어머니 손에 끌려가다시피 딱지치기를 하러 나갔다. 동네 아이들은 딱지치기에 한창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덩치가 나보다 작았던 한 아이를 데려오셨다. 그게 내 딱지판 데뷔전이었다. 첫 번째 딱지는 단 두 번 만에 넘어갔다. 두 번째 딱지도. 세 번째, 네 번째, 그 이후에도 딱지를 연달아 잃었고 쉽게 달력딱지를 딴 녀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그 아이 곁으로 가 1,000원짜리를 건넸다. 한번 져주라는 뜻이었다. 어머니께 ‘매수 당한’ 아이는 이제 내 딱지를 넘길 마음이 없다는 양 딱지가 아닌 바닥을 향해 딱지를 내리쳤지만 딱지판 새내기인 나는 아무리 힘껏 내리쳐도 그 녀석의 딱지를 넘길 수 없었다. 이미 닳고 닳은 그 아이의 딱지는 달력으로 갓 만든 내 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과의 접착력이 좋아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넘기지 못하자 그 친구는 재미없다며 자기 딱지를 챙겨 들고 자리를 옮겨갔다.

그 이후로 다시는 딱지치기를 하러 가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락실도 다니지 않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자라서는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도 하지 않았는데 착실한 아이여서 라기보다 안 될 싸움은 처음부터 하지 말자는 심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끝까지’ 놀아본 경험이 없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면 싸우지 않으려 했다. 질 수도 있는 싸움은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질 수밖에 없더라도 해야 하는 싸움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사에 끝을 보지 못하는 성급함은 끝까지, 끝을 볼 때까지, 울면서 매달리고, 힘겹게 어떤 지점까지 도달해 보려는 경험, ‘딱지치기의 끝’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새로운 유치원을 가기 전날 밤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림도 잘못 그리고, 영어도 못하고, 축구도 잘 못해.” 아이 유치원에 가보니 아이의 그림은 옆에 걸려있는 다른 아이 그림보다 못하다. 공차기도 뭔가 어설프다.

“댁의 아이가 반에서 좀 처진대요.” 얼마 전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들은 말이다. 순간 어질했다. 집에 돌아와 일곱 살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야 할까, 이제는 축구 교실에라도 보내고, 노는 것도 ‘뒤처지지 않도록’ 놀이교실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영어도, 수학도 안 가르쳤으니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구교실 대신 친구들과 축구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뒤처진다고 하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어머니는 딱지치기에서 이기게 도와줄 수 있는 ‘딱지치기 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1,000원을 건네서라도 이기게 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아빠가 되고 나서야 어머니가 왜 그러셨던 것인지 이해가 된다. 나 역시 내 아이가 지는 것을, 져서 속상해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새로운 유치원이 어떤지 물었다. 재미있단다. 축구도, 영어도 잘 안 되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고 한다. 내일도 또 할 거라고 했다. 아이에게 이기는 경험을 줄까, 지더라도 다시 도전하는 경험을 줄까. 이럴 때 육아가 힘들다.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싸움에 도전하는 것’보다 더 고귀하다고 믿는 세상에서 아이에게 시간을 주고, 꼭 이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육아를 위해 매수금 1,000원이 필요하지도, 너무 많은 용기도 필요하지 않은 사회였으면 좋겠다.

권영민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저자ㆍ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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