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의 일상 속 자연 누리기(11)

서울 도심에 벚꽃이 지고 철쭉 철이 시작됐다. 어디를 가나 울긋불긋 화려한 철쭉이 눈길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 시기에 수수하게 아름다운 조팝꽃을 빼놓을 수 없다. 주택가 울타리로 조성한 조팝은 벌써 꽃이 지고 연록색 순이 무성하지만 남산 일대나 동네 뒷산에는 흰구름처럼 피어난 조팝이 절정이다.

서울 남산공원의 조팝꽃. 마치 흰구름이 피어 오르는 것 같다(SAMSUNG NX1).

요즘 지방으로 여행하는 길 차창 밖 풍경은 조팝꽃 세상이다. 야산 자락이나 개울가, 논두렁, 밭두렁에 온통 조팝이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가두기 시작한 논에 거꾸로 비친 조팝꽃 군락은 정말 아름답다. 요즘 시골 풍경은 조팝을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유년 시절 조팝꽃을 꺾어다 집안에 꽂아두던 기억도 새록새록 나 고향집이 그리워진다. 지금 서른살이 된 첫 아이가 이즈음에 태어났는데, 돌 잔치 때 야생 조팝꽃을 돌잔치 상에 올렸던 생각도 난다.

묵정밭 가에 무리지어 핀 조팝.
요즘 중부지방 어디 가나 조팝 핀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조팝은 키 1~2m 정도로 자라는 떨기나무(관목)인데 꽃을 자세히 보면 튀긴 좁쌀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조밥→조팝(ㅎ종성 체언이 다른 말과 결합할 때 격음이 됨)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비슷한 이름으로 이팝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꽃은 5월에 피는데 모양이 쌀밥 같다. 쌀밥을 이밥이라고도 했는데 이밥→이팝이 되었을 것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조상들은 조팝꽃을 보며 조밥을, 이팝꽃을 보고 그득 쌓인 고봉쌀밥을 떠올리며 배고픔을 달랬으리라. 조팝나무 새순은 이른 봄 실제로 배고픔을 덜어주는 훌륭한 봄나물이기도 했다. (사진 조팝과 이팝 비교)

왼쪽이 좁쌀 튀긴 것 붙인 듯한 조팝꽃. 오른쪽은 이밥(쌀밥)을 연상시키는 이팝꽃.

조팝꽃은 달콤한 향도 좋다. 꿀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까시 꽃이 피기 전인 요즘 시기에 벌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밀원이 된다. 지리산 자락인 전북 남원군 운봉 지역은 조팝꿀로 유명하다고 한다. 또 조팝꽃은 화병에 꽃아 놓으면 오래가 꽃꽂이(절화)용으로 각광을 받는다. 특히 골프공을 반으로 잘라놓은 것처럼 둥글게 피는 공조팝은 이른 봄 고급호텔 로비의 대형 화병에 꽂아 봄 분위기를 돋우곤 한다. 연록색 잎과 함께 치렁치렁 늘어뜨려지는 꽃송이가 청순하기 그지 없다. 수국처럼 결혼식장 장식 꽃으로도 많이 쓰인다.

반구형 흰꽃이 치렁치렁한 공조팝.

약용 성분이 많은 조팝나무는 우리 인류에게 매우 고마운 식물이다. 현재 전 세계 인구가 하루에 1억 알을 넘게 먹는다는 해열진통제 아스피린은 조팝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사가 1899년 조팝나무 추출물질을 정제해 알약 형태로 상품화한 게 바로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이란 명칭 자체가 아스피린의 화학명 아세틸살리실산의 머리글자 아(A)와 조팝나무의 학명 스피리어(Spiraea)를 조합한 것이다.

당조팝. 공조팝과 비슷하나 잎 모양이 좀더 넓어서 구분된다(홍릉).

재미 있는 것은 아스피린의 핵심 성분인 살리실산(Salicylic Acid)이 원래 버들에서 처음 추출된 물질이라는 점이다. 살리실산은 버들의 학명 Salix에서 유래했다. 버드나무의 진통해열 성분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발견돼 이용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대로 복용했을 때 구토 등의 부작용이었는데, 독일의 약리학자가 조팝나무에서 추출한 살리실산으로 구토 등의 부작용이 없는 아스피린을 만드는 바람에 버들은 인류에 공헌함으로써 얻게 된 이름을 그만 조팝나무에게 빼앗긴 것이다. 버들로서는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노릇이다. 아스피린은 요즘 단순한 진통해열제를 넘어 심장병, 뇌졸중, 고혈압은 물론 식도암 대장암 등의 예방 및 치료제로 쓰인다. 일부 부작용이 없지 않지만 해마다 새로운 효능이 추가돼 말 그대로 만병통치약이 되어가고 있다.

갈기조팝(두산백과사전)

지구상에는 100여 종의 조팝나무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생하거나 재배하는 조팝은 20종 가량이다. 정원에 많이 심는 당(唐)조팝은 반구형 꽃이 아름답다. 공조팝과 비슷한데 잎이 보다 넓다. 갈기조팝은 강원 이북에 분포하는데, 반구형 꽃송이가 피는 모양이 말의 갈기를 연상시켜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6월에 엷은 분홍색 꽃이 피는 일본조팝은 공원이나 화단가에 조경용으로 많이 심는다. 꼬리조팝은 6~8월에 동물꼬리 모양으로 가지 끝에 분홍색 꽃이 핀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핀 꼬리조팝꽃은 청초하기 그지 없다. 그러고 보면 조팝은 이른 봄부터 8월까지 우리 곁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꼬리조팝. 6~8월에 핀다(네이버백과).
분홍색깔 꽃이 예쁜 일본조팝. 정원에 조경용으로 주로 심는다.

단풍 든 것처럼 잎과 꽃이 여러 색깔인 삼색조팝은 원예종인데 화단 등에 요즘 많이 심고 있다. 인가목조팝, 좀조팝, 떡조팝, 아구장나무 등도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아름다운 조팝 종류다. 그냥 스쳤던 조팝들을 이젠 좀더 눈 여겨 보며 감상하고 고마움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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