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만큼 예측을 빗나간 선거는 없었다. 선거 직전 가까운 후배인 정치평론가 유승찬이 정부와 여당 심판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칠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개인적인 소망적 사고라고 생각했다. 새누리당의 우세와 국민의당의 약진을 예견했던 나는 절반이 틀린 셈이었다.

사회학 연구자가 미래를 예측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현재 없는 미래 없듯, 선거 결과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현재의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과소평가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이 칼럼에서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을 다루기도 했고 저성장과 불평등 시대에 치러지는 선거의 의의에 대해 쓰기도 했지만, 불안과 분노가 거부와 심판으로 표출된 국민 다수의 정치의식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 같아 내심 부끄러웠다.

무릇 선거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는 그 사건의 표층적·중층적·심층적 의미가 존재한다. 이번 총선에 담긴 표층적 의미는 기성 정치 행태에 대해 임계점을 넘은 염증이었다. 새누리당의 ‘옥새 파동’과 더민주당의 ‘셀프 공천’ 논란은 대표적 사례였다. 가치와 자원 분배의 최종 의사결정을 통해 사회 발전을 이끌어야 할 정치가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본 다수의 유권자들은 폴란드계 미국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가 ‘종이돌(paper stone)’이라고 부른 투표용지를 던져 기성 정치를 엄정하게 심판했다. 그 일차적 대상은 물론 권위적이고 무능한 박근혜정부와 여당이었다.

중층적 의미는 중도층의 능동화다. 우리 사회 이념 구도의 특징은 ‘단봉(單峯)형’과 ‘쌍봉(雙峯)형’이 공존한다는 데 있다. 크게 보아 중도가 두터운 단봉형 낙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자세히 보면 보수적 산업화세력 대 진보적 민주화세력이 강력한 발언권을 갖는 쌍봉형 낙타 모양을 이룬다. 정치적 공론장에서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쌍봉형 구도의 전위대라 칭할 만하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종편과 SNS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중도층이 정치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보지 않고선 지역구 공천을 전국적으로 하지도 못했던 국민의당의 선전을 독해하기 어렵다.

정당투표에서 제2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당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 국민의당에 대한 중도층의 적극적 지지에는 민주화 시대 보수 대 진보의 끝없는 파국적 균형의 피로감과 기존 양당 체제에 대한 심판의 욕구에서 비롯된 반사 이익이 작지 않다. 국민의당이 대안적인 국가 비전과 정책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중도보수와 중도진보 유권자들은 본래의 지지 정당이나 정치적 무당층으로 언제든지 되돌아 갈 수 있다.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 간의 정책적 차이를 생산적으로 종합하는 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심층의 측면에서 주목할 것은 미래로부터의 도전이다. 유권자의 관점에서 비록 짧은 시간이더라도 신분증을 지참하고 투표장으로 향하는 그 순간은 더없이 진지하고 소중하다. 어떤 후보 및 정당이 나의 생각과 소망을 대표할 수 있는지의 질문에 마주하는 엄중한 순간이다. 지난주 수요일 투표장으로 향했던 다수 유권자들의 심층의식을 짓누른 것은 ‘두 겹의 불안’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성장과 불평등의 현재가 안겨주는 불안이 한 겹이라면, 다른 한 겹은 지난 3월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알파고 현상’이 가져다 준 불안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일상생활에 더 큰 편리함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파고 현상에는 일자리의 감소와 빅 브라더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미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무의식적인 심층적 불안이 기성 정치에 대한 심판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열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 철학자 헤겔의 말이다. 앞서 말한 나의 거친 분석 역시 미네르바의 부엉이와도 같은 지난 사건에 대한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심에 대한 정확한 독해 없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없다는 점이다. 20대 총선의 짧은 지질학적 탐색을 여기에 적어두는 까닭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