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천일야화] 5. 혜초기념비의 명과 암

경북도 실크로드 사전답사팀이 2012년 12월 중국 산시성 저우즈현을 찾아 붕괴 위험에 놓인 혜초기념비 보존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 왼쪽) 말끔하게 보수된 혜초기념비.(오른쪽)

“중국 시안씩이나 와서 왜 자꾸 촌길로만 달립니까?” “일단 가보시라니까.”

그곳은 깡촌이었다. 시안(西安)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버스타고 2시간 정도 거리의 산시성 저우즈현 선유사 인근은 운전기사도 길을 몰라 “워 나알 쯔다오”(내가 어떻게 알아)라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늘어놓던 오지였다. 2012년 12월14일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등 경북도 실크로드 사전답사팀이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오로지 ‘혜초’ 때문이었다.

현지가이드도 모르는 길을 정 소장이 좌표를 잡아줬다. 버스에서 내려 한 10분쯤 언덕길을 오르니 탑 왼쪽으로 정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혜초기념비가 있는 정자였다.

시안에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천지삐까리인데 비석 하나 보려고 굳이 촌구석까지 찾아왔나싶어 억울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기왕 왔으니 뭔지 알고나 가자’며 상처받은 마음에 보호막을 쳤다.

비석과 정자 꼴이 말씀이 아니었다. 콘크리트 지지대 2개가 붕괴 직전의 정자를 떠받치고 있었고, 지지대에는 危險(위험)이란 한자가 선명했다. 정자 처마 밑에는 부채 모양의 ‘혜초기념비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신라국 대덕고승’과 ‘대한민국대통령 김대중’이라는 글자도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현판 글씨를 직접 쓸만큼 각별한 곳이라는 얘기였다.

3m 높이의 ‘신라국 고승 혜초기념비’ 뒷면에는 글자의 절반이상이 벗겨져 있었다. 붕괴직전의 정자에다 낙서와 과자봉지, 담배꽁초가 바로 혜초기념비의 첫인상이었다.

혜초기념비는 2001년 6월 우리나라 조계사와 중국 측 선유사가 한중 불교 교류협력 차원에서 건립했다. 혜초가 선유사와 인연이 깊기 때문이었다. 정 소장이 이전 공사 중인 선유사의 임시사찰을 찾아가 비석 관리상태를 따졌더니 “한국 측이 유지보수비를 주기로 약속해놓고 뒷짐지고 있다”는 창하오 스님의 답변만 돌아왔다. 이곳 사찰의 한쪽 방에는 혜초 스님과 제자 4명을 그린 액자 5개가 걸려 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날 오후 정 소장 등 답사팀은 재중 시안총영사관을 방문해 전재원 총영사와 혜초기념비 복원 및 보존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나도 밥값을 해야 했다. 혜초기념비 훼손 기사는 3일 후인 12월17일 한국일보 2면에 보도됐고, 경북도와 시안총영사관이 발빠르게 복원사업을 추진한 결과 조계종 측이 6만위안, 경북도 4만위안, 시안 한인회 2만위안 등 모두 12만위안으로 복원사업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혜초는 도대체 누구인가. 혜초(704∼780)는 720년 열여섯의 나이에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광저우에서 인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를 만나 제자가 됐고, 인도 땅까지 밟게 됐다. 그가 쓴 ‘왕오천축국전’의 천축은 바로 인도를 가리킨다.

혜초는 4년간 천축국과 중앙아시아, 이란 니샤푸르까지 순례한 후 장안으로 돌아왔다. 니샤푸르는 이란 동북부 시아파 성지인 마슈하드에서 125㎞ 떨어진 실크로드 도시다.

도중에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는 장안에서 금강지와 밀교경전 연구에 몰두한다. 혜초기념비가 선유사 근처에 있는 것은 혜초가 선유사 인근 옥녀담에서 기우제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우제의 효험을 적은 ‘하옥녀담기우표’라는 표문을 지어 황제에게 바치기도 했다.

당 황실의 신뢰 속에 밀교의 계보까지 이어받은 혜초는 1,300여 년전 신라를 떠나 멀리 아랍국가까지 다녀온 우리나라 실크로드 개척자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중국 간쑤성 둔황의 막고굴 17호굴 전경.

왕오천축국전 얘기가 나왔으니 둔황 막고굴 얘기를 건너뛸 수가 없다. 답사팀은 며칠 후 50인승 비행기를 타고 중국 간쑤성 둔황에 도착했다.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용문객잔 정도의 분위기를 상상했지만 그곳도 엄연히 인구 18만이 사는 도시였다.

492개의 석굴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막고굴은 복도식 저층 아파트를 닮았다. 층층마다 동굴 문이 아파트 입구와 흡사했다. 입구에서 카메라를 맡기고 들어가니 둔황연구소 리신 연구원이 우리가 왜 왔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성큼성큼 앞장서다 16호실 앞에 섰다. 이 석굴은 사각형의 전실과 연도, 본실로 되어 있었다. 굴 안은 암흑이었다.

우리가 16호굴을 보려고 천리길을 달려온 것은 아니었다. 장경동으로 불리는 17호굴이 우리의 목적지였고, 그 곳은 16호굴 안에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곁굴이었다.

17호굴은 쇠창살로 문을 만들고 자물쇠까지 채워 볼 수만 있을 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당초에 존재 여부도 몰랐는데 1900년 6월22일 연기가 벽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이상히 여긴 인부와 막고굴 책임자였던 왕원록 도사에 의해 발견됐다.

3m 정도의 정방형 공간에는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 각종 문자로 된 서적과 두루마리 필사본 5만여 점이 숨어있었다. 20세기초 오렐 스타인, 폴 펠리오, 오타니 고즈이, 랭던 워너 등 학자를 가장한 문화약탈꾼들은 왕 도사에게 돈 몇 푼 쥐어주고 이 귀중한 자료들을 상자에 바리바리 실어 자신의 나라로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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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1908년 고서적과 문서로 뒤덮힌 막고굴 17호굴에서 촛불 하나만 밝힌 채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1908년 13개국 언어에 능통했던 프랑스의 폴 펠리오도 촛불 하나만 밝힌 채 장경굴에서 3주를 보내게 된다. 이곳에서 히브리어 ‘면죄부’와 티베트어 ‘연대기’, 위구르어 ‘현장삼장전’ 등 서책 1,500여권과 회화, 직물 등을 추려 프랑스행 선박에 스물 아홉 박스나 실어보내게 된다. 바로 이 속에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던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7세기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어깨를 겨루는 세계 4대 여행기다. 이만하면 혜초가 우리나라 실크로드 개척자임이 자랑스럽지 않은가.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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