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2주기] 두 번째 봄 <상> 아픔마저 성장하다

2년 전 봄, 친구와 재잘거리며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2학년 학생 중 생존자들은 어느덧 꽃다운 스무 살, 대학 신입생이 됐다. 영문도 모른 채 온 몸으로 참사를 겪어내느라 쌓였던 아픔과 고통은 풀리지 않는 짐이다. 하지만 살아내야 한다. 친구들 몫까지 잘 사는 게 내 임무라고 새삼 다짐한다. 두 번째 봄. 이들은 새로운 일상에 조금씩 녹아 들며 다시 꿈을 가꾸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 난간 한 켠에 ‘To 00군, 하루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합니다. (시민)K’라고 적힌 운동화가 묶여 있다. 진도=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꿈에서도 나오는 ‘그날’, 4ㆍ16

세월호 생존 학생 김민지(19ㆍ가명)양은 아직도 자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 일이 잦다고 고백했다. “꿈 속에서도 꿈이라는 걸 알긴 아는데 힘들어요. 매번 같은 꿈이죠. 잠에서 깨어나면 방은 너무나 고요해 ‘휴’ 하고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죠. 하지만 다시 눈을 감을 자신이 없어져요.”

그 날 이후 732일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차디찬 4월의 바다에 맨 몸으로 뛰어들던 그 날의 그 느낌이 생생하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5m 앞 까만 해경 구명보트를 향해 친구와 함께 외쳤지만 해경대원은 민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멀어졌다. 허우적대며 몇 차례 더 소리 친 뒤에야 보트가 멈췄다. 간신히 보트에 매달린 순간 한 아저씨가 민지의 손을 때리며 외쳤다. “너희까지 타서 보트가 가라앉으면 어떻게 할거야.” 버티고 싶었지만 손을 놓쳐 물 속에 빠져버렸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다시 보트를 잡았다. 다행히 다른 남성이 그를 보트 위로 끌어올려줬다.

꿈이라도 꾸는 지금은 그나마 양호해진 편이다. 4ㆍ16 참사 직후부터 지난해 초까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 없었어요. 눈을 감으면 그날의 잔인했던 바다가 떠오르곤 했죠. 보고 싶은 친구의 얼굴도 아른거렸어요.” 외로움과 불안감, 사고의 트라우마가 얽히고 설키면서 홀로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셌더라면….”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 박준혁(19)군은 그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21분. 준혁이가 배 밖으로 빠져 나오던 그 순간 세월호는 거의 침몰 상태였다. 대부분의 구조선은 이미 세월호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극적으로 탈출한 준혁이를 근처에 있던 어업지도선이 발견해 구조했다. 당시 준혁이와 함께 복도에 있던 100여명 가운데 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사람은 6명뿐이었다.

준혁이는 “마지막에 수정이 손을 놓친 게 자꾸 걸린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친구 수정이 이야기만 나오면 긴 침묵이 이어졌다. 사고 충격 탓에 진도실내체육관에 도착한 순간부터 병원에 있던 날까지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던 준혁이었지만 유독 그 순간만큼은 생생하게 떠올렸다.

세월호 복도에서 준혁이는 수정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물살이 밀려오면서 손을 놓쳤고 수정이는 그대로 배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준혁이는 “가끔 꿈 속에서 수정이의 시점으로 당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사라진 친구, 무너진 일상

지난 2년 민지와 준혁이가 다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부재다. 평생 함께 하자던 친구는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지키지 못한 수 많은 친구와의 약속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

인터뷰 내내 똑 부러지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민지였지만 절친 민진이(가명)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떨렸다. 중ㆍ고교를 함께 다닌 데다 이름까지 비슷했던 둘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아는 친자매나 다름 없는 사이였다. 친구들은 민지와 민진이를 ‘1+1’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평생 볼 건데 뭐, 다음에 같이 하면 되니까. 그런 생각 때문에 민진이와 함께 못한 게 많아서 후회돼요.” 교내 활동으로 바빴던 민지는 ‘놀러 가자’는 민진이의 제안에 종종 “다음에”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건 때문에 ‘다음’은 사라졌다. “수학여행 가기 전에 민진이가 어느 가게 감자튀김을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먹기로 했는데 요즘 그 가게를 볼 때마다 자꾸 민진이 생각이 나요.” 민지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대학에 들어와 새로운 환경에서 새 친구들도 만났지만 민지는 민진이의 자리를 비워뒀다. “요즘 제일 힘든 게 나는 변해가는데 사진 속 민진이는 똑같다는 걸 느낄 때에요.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이 이모가 엄마랑 가장 친했던 친구야’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사진 속 민진이는 늘 열여덟 살일 테니….”

초등학교 때부터 배드민턴이 취미였던 준혁이는 요즘 라켓을 잡을 일이 없다. 중학교 때부터 함께 배드민턴을 치던 친구 기수가 없기 때문이다. 초중고를 붙어 다니며 함께 오락실과 PC방에 놀러 갔던 경빈이도 준혁이의 곁을 떠났다. 바다가 친구들을 삼킨 이후 많은 게 바뀌었다. 준혁이 역시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대학 입학 직전까지는 방안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며 홀로 시간을 보냈다”고 토로했다. 준혁이는 “일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친구들이 사라지니 차곡차곡 쌓여있던 삶이 우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며 “지난 2년간 친구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생존 학생들은 일부의 오해와 왜곡을 견디는 것도 어려움이라고 털어놨다. 간혹 온라인상에서 단원고 생존 학생의 대학 특별입학 전형을 두고 ‘단룡인’ 혹은 ‘안산충’이라고 손가락질 할 때마다 마음에 생긴 생채기는 점점 커졌다. 민지는 “특별입학 전형에 대해 ‘대단한 단룡인 납셨다. 비루하게 살아 돌아오셨으니 수영 선수나 해보시라’는 댓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일일이 대꾸할 수도 없다. 대응하는 순간 개인의 의견이 아닌 생존 학생 전체의 의견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 많이 받았어요. 왜 욕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제 행동 때문에 생존 학생 전체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댓글을 달았던 사람의 얼굴을 마주볼 기회가 생긴다면 차근차근 우리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긴 해요. 물론 제 얘기 듣는다고 바뀔 사람이었다면 과연 온라인 상에서도 그렇게 말했을까 싶긴 하네요.”

단원고 세월호 생존자 박준혁군. 박군은 오른손에 낀 세월호 반지를 인터뷰 중간 중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나를 일으켜 세운 당신들

“우리에겐 세월호 사건이라는 겨울이 찾아왔지요. (중략)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역경을 겪었고 그것을 함께 극복하고 성장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스스로가 강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1월 12일 단원고 졸업식 3학년 졸업생 답사)

생존자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도,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만 할거냐’는 비난도 모두 학생들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학생들은 졸업식 답사처럼 역경을 딛고 일어나 사회로 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신을 이해해준 가족과 친구, 그리고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약속이 있었다.

당초 민지는 대학생이 되던 날 페이스북과 메신저 프로필에 있던 단원고 졸업사진이나 세월호 추모 사진을 모두 지웠다. 대학 친구들에게도 자신이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색안경을 끼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입학 후 친구들 사이에서 고3 수험생 생활이나 고교 시절 친했던 친구 이야기가 나오면 민지는 늘 입을 닫곤 했다. 친구들이 자신을 믿고 속내를 털어놓을 때마다 '친구들은 나를 믿는데 나는 친구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쌓여 괴롭기도 했다.

결국 수많은 고민 끝에 민지는 2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때 학과 선배를 찾아가 “난 세월호 생존자이고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고 털어놓았다. 선배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은 작은 세상에 불과하다. 앞으로 큰 세상을 향해 가기까지 많은 일이 있을 텐데 작은 세상 때문에 무너지거나 위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격려해줬다. 그날 이후 민지는 더 용기를 냈다. 외출할 때면 손목에 노란 세월호 팔찌를 찼고 가슴에는 노란 리본 배지도 달았다. SNS에도 다시 세월호 관련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친해진 친구들에게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들이 ‘이미 알고 있었어’, ‘그게 뭐 어때서’라면서 아무렇지 않아 했어요. 그게 정말 고마웠어요.”

말수도 적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준혁이도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는 주저 없이 누나를 꼽았다. 다섯 살 터울의 누나는 참사가 발생하자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2년째 세월호 대책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준혁이는 “누나가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 누나가 정말 많이 챙겨준다. 특조위 청문회가 열렸을 때는 내가 못 봐도 어떤 내용이었는지 세세하게 이야기해줬고, 몇 달 전 내가 방송에 나갔을 때는 응원의 댓글을 A4용지에 모아서 책 형태로 만들어줬다”며 고마움을 숨기지 않았다.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도 학생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민지는 인터뷰 도중 노란 세월호 열쇠고리를 가방에 건 남성이 지나가자 말을 멈추고 한참을 지켜봤다. “저런 분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며 배시시 웃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학생회 활동에, 축제에 평범한 스무 살의 꿈

“세상이 세월호 사고를 잊지 않길 바라죠. 아이들은 특별한 일을 겪었고요. 하지만 사고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이제 모두 평범한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생존 학생 최경하(19ㆍ가명)양 아버지(45)는 딸이 아픔을 버티며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것만해도 다행이라고 했다. 경하는 가족들에게도 그날의 일과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은 적이 없다. 가족들도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믿음으로 경하를 지켜줬다.

지난 2월 경하네 가족들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바쁜 일상 탓에 부모님과 경하의 두 동생까지 다섯 식구가 모두 함께 한 가족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여행 제안에 경하가 정한 여행지는 뜻밖이었다. 제주도. 바로 그날 도착하지 못했던, 단원고 수학여행 목적지였다. 최씨는 “늦겨울이라 날씨가 좋지 않았고 사진도 거의 다 흔들렸지만 성산일출봉도 보고 많은 추억을 만들고 왔다. 경하가 ‘아직 배는 못 타겠다’고 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즐겁게 다녀온 것 같다”고 말했다.

민지는 대학 입학 후 학과 학생회 활동을 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처음에는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나중에 나를 잘 모르는 친구들이 내가 세월호 생존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단원고 출신이라 부족하다’고 말하면 희생자, 생존자 친구들에게 욕이 될 것 같아서 더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죠.” ‘세월호 사고 생존자’라는 꼬리표가 어떤 선입견을 낳는지 민지는 이미 온라인 악성 댓글로 경험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장점인 적극적인 성격을 살리려 학생회 문을 두드렸다. 최근에는 중간고사 시험 공부에 더해 학생회에서 행사 일정 안내 대자보도 쓰고 다음달 축제 준비로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친구들과 교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일상, 한강공원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치맥’을 먹는 평범한 대학생활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준혁이는 대학에서 좋은 학점을 받는 게 목표다. 인터뷰 전날에도 발표 준비를 위해 밤을 샜단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학과 학회에 참여한 뒤 집에 가서 비평문도 하나 더 써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학과 선배, 동기 100여 명과 함께 간 답사에서 전공 관련 발표도 했다. 준혁이는 단원고 세월호 특별입학 전형에 붙은 ‘운 좋게 대학에 들어왔다’는 일부 부정적인 시선을 극복해내는 방법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대학생활을 열심히 했는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모님은 단원고 특례입학이라고 따돌림 당하거나 안 좋게 바라볼까 봐 걱정하시는데 저는 걱정 없어요. 제가 잘하면 욕 안 먹을 거라는 생각이에요.” 준혁이가 대학 친구들에게 단원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고, 언론과의 만남도 피하지 않는 이유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힘들어도 자꾸 밖으로 나가 잘못된 시선을 바로 잡는 것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학생활의 소망을 말하는 준혁이는 영락없는 평범한 스무살 새내기이기도 했다. “음. 중간고사가 얼른 끝나 축제도 보고 싶고, 나중엔 CC도 해보고 싶어요.”

지난해 1월 9일 오전 경기 안산시 단원구 단원고등학교에서 제8회 졸업식이 열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지닌 단원고 2학년 재학생들이 졸업하는 3학년 선배를 위한 합창 공연을 하며 울먹이고 있다.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아픔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자라납니다

다시 봄이다. 2년의 시간 동안 학생들은 세월호를 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월호만 생각할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났으니 이젠 괜찮아질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물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친구들은 죽었는데 너만 잘 지낸다”며 손가락질했다. SNS에 일상 사진 한 장을 올릴 때조차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여전히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수학여행’이라는 단어에는 눈물이 맺히고 장기자랑 때 준비했던 노래만 들어도 가슴이 저릿하다.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아픔 속에서도 스무 살 학생들의 꿈은 자라고 있다. 민지는 방송PD를 꿈꾼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바로 잡고 전달하는 PD가 되고 싶다”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정치적 관점이 배제된, 세월호 참사 그 자체와 소중했던 당시 친구들의 이야기가 담긴 방송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민진이의 꿈까지 이뤄줄 수는 없지만 친구를 생각하며 두 배로 열심히 살겠다”며 웃었다. 역사를 좋아하던 준혁이는 사학과를, 유치원 선생님이 꿈인 경하는 유아교육과에 입학했다. 꿈에 한 발짝 다가간 셈이다. 몇몇 학생들은 참사를 겪은 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응급구조학과나 심리치료학과로 진로를 변경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뜻도 내비쳤다. 김희은(19·가명)양은 4ㆍ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과의 인터뷰에서 "잊혀지지 않게, 사람들이 계속 기억할 수 있게 전 세계에 세월호 참사를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2년은 부모님께서 하셨지만 결국은 우리의 문제잖아요. 기회가 된다면 졸업 후 세월호 관련 일을 해보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리멤버 0416’이라고 새겨진 은색 세월호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준혁이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느덧 아이들은 아픔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꿈꾸며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라있었다.

허경주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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