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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칼럼] 집단트라우마 마주하기

입력
2016.04.1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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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지진 전쟁 같은 큰 재난을 겪은 후 찾아 오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이제 웬만한 사람은 알 정도의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끔찍한 상황을 잊으려 해도 계속 생각나고, 악몽을 반복해 꾸거나, 비슷한 장소나 상황 등을 회피한다. 기억이 사라지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있고, 불면, 분노감, 집중력 저하, 지나친 경계심, 깜짝 깜짝 놀라는 등의 다양한 증상을 보인다. 기억과 정동(情動)을 관장하는 편도체, 시상하부, 송과선 등 뇌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 면역호르몬인 코르티졸, 정동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도 교란이 된다. 재난이나 외상을 겪은 후 신체적인 질환이 생기고 학습이나 작업 수행 능력도 떨어지는 이유다. 공동체에 영향을 줄 정도의 전쟁, 테러, 큰 참사가 일어나면 그 후유증이 개인의 외상보다 훨씬 더 오래가게 된다. 수백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다친 6ㆍ25 전쟁의 심리적 여파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이 그 예다. 자연 재해가 아닌 정치적 상황으로 입은 트라우마는 분노가 서로에게 투사되기 때문에 더 힘들고 오래간다. 르완다, 팔레스타인, 보스니아, 시리아 등등 끔찍한 집단 트라우마로 인한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단 트라우마를 잘 극복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들은 심리치료, 약물, 행동요법 등으로 최선을 다하겠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일종의 지침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우선 “이젠 그 이야기는 그만하라” “과거는 다 잊어 버리고 앞만 보고 살라”는 식의 조언부터 삼가야 한다. 큰 외상은 우리 몸의 세포에도 변화를 줄 정도라 노력한다고 잘 잊혀지지 않는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강박적 사고와 조절할 수 없는 정동반응으로 피해자와 가족들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일단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그만 말하라’ ‘잊어버리라’는 주문은 그래서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집단 트라우마로 인한 무기력, 자포자기, 냉소주의부터 치료해야 한다. 한국인이 아닌 외래 열강의 정치적 거래로 비롯한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짚신(못난 한국인)이 다 그렇지” 하는 식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미국병, 선진국병 등의 사대주의에 빠진 것도 그 예다. “어차피 세상은 악한 세력이 이기게 되어 있어” 같은 도덕적 아노미 상태와 집단주의도 경계해야 할 함정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이나 이탈리아 국민들이 전쟁 후유증과 경제침체의 이중고를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벗어버리고 유대인 학살과 전체주의적 독재를 용인한 것도 악에 대한 정신적 버팀목이 무너진 결과라 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는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변환돼야 회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회복될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은 고통 속에 빠져 있게 되지만, 그런 사로잡힘에도 사실은 치유의 기능이 있다. 가슴속 상처를 승화시켜 회복될 때까지 소중하게 잘 다루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과 사회가 겪은 트라우마가 지향하는 의미를 깨닫고 보다 큰 흐름에 동참하게 된다. 집단 트라우마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시점이다. 돌이켜 보면, 3. 1 운동, 4ㆍ19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적 사건 때 무수한 인명이 희생됐고 공동체는 큰 외상과 내상을 입었지만, 바로 그런 상처와 분노가 바로 역사를 바로잡고 발전시키는 동인(動因)이었다.

지난 2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였던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한국 분석심리학회도 4월 30일, 집단 트라우마와 심리를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자기 안의 방에만 머물며 사회적 변화나 상처에는 무관심하던 전문가들도 세월호 참사 때 진심으로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한 참여했었다.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었나 싶다. 피해자들과 공동체가 원하는 진정한 치료는 단순한 개인적 증상의 완화가 아니라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고 우리 사회의 어떤 병리현상이 반영된 것이었는지, 그래서 보다 정의로운 미래를 위해 무엇을 고치고, 어떻게 각성해야 하는지 까지를 포함하는 전폭적인 수술일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기억의 숲이 팽목항 근처에 조성이 되었다 한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화재 등등 큰 인재를 우리가 똑똑히 기억하고 철저하게 시스템을 정비하지 못한 회한이 담긴 숲일 것이다. 과거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지 못하고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참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동체의 큰 불행을 보면서도, 각 개인의 불운에 불과하다는 냉소적 태도나,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식의 이기주의라면, 죄 없는 희생물을 괴물에게 바치다 결국 모두 다 죽게 되는 전설 속의 마을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집단트라우마는 의식과 무의식에 남아 다양하게 앞으로도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외면하고 입을 다물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말하고 구체적으로 변화하는 것만이 치유의 왕도다.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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