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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분투기] 아이방의 크기와 행복의 상관관계

입력
2016.04.1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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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낡고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다. 22평이라지만 구조도 옛날식이고 복도로 빠진 공간도 커서 실평수는 이에 훨씬 못 미친다. 현관문을 열면 부엌 겸 거실이 한눈에 들어오고 왼쪽에는 작은 방과 큰 방이 욕실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중앙난방식 아파트라 초봄, 초겨울에는 집안 공기가 서늘하고 한겨울이면 수도 동파 사고가 빈번해서 바짝 긴장해야만 한다.

결혼 후 2년이 지났을 무렵,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이 집을 샀다. 큰 빚을 등에 엎고 매달 월세 같은 이자를 은행에 내야 했지만 나는 신이 났다. 원룸과도 다를 바 없었던 신혼집에 비하면 충분히 넓었고 주인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 참 편안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집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늘어나는 아기 살림과 커다란 장난감들은 금세 집을 잠식했다. 공간이 좁아지자 아이는 더 자주 부딪히고 넘어졌다. 모든 가구에 안전보호대를 부착하고 아기용 울타리도 설치해야 했다. 소파를 처분하고 가구를 옮기고 또 옮겼지만 공간은 도무지 넓어지지 않았다.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집들을 보면 부러움에 속이 탔다. 넓은 거실과 깔끔하게 정리된 육아용품에 눈이 돌아갔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활개치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멀쩡한 내 아이가 괜히 불쌍했다. 좁은 집이 답답하진 않을까. 아이가 어릴수록 집이 넓어야 한다던데 집이 좁아 아이의 행복도 작아질까 걱정이었다.

다행히 걱정은 조금씩 사라졌다. 아이가 말을 하자 감정과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였다. 욕조에서 아이가 물놀이를 할 때였다. 처음으로 가슴팍까지 물을 받아주었는데 그 느낌이 낯설었던지 아이는 가만히 팔만 휘저으며 한참을 물에 집중했다. 그때 나는 욕조의 지워지지 않는 물때와 곰팡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TV에서 본 깨끗하고 널찍한 욕조를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그때 아이가 불쑥 “엄마,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아이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처음 말한 순간이었다. 부끄럽게도 감동의 눈물이 맺혀버렸다. 아이의 행복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찾아오는데 엄마는 좋은 욕조를 욕심 내며 그것이 아이의 행복과도 연결된다고 착각했다. 그렇게 한 번씩 아이 입에서 기분 좋은 말들이 튀어 나올 때면 나는 아이와 함께 사는 이 집이 한껏 사랑스럽다.

얼마 전 뒤늦게 영화 ‘룸(ROOM)’을 봤다. 17세에 납치된 한 여자가 7년 동안 작은 방에 감금된 채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내용의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기에 더 관심이 갔다. 나는 아이가 궁금했다. 방안에서만 자란 아이는 어떤 상태일까. 트라우마에 갇혀 어둡고 우울한 성격을 지녔을 거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랑스러웠다. 좁은 방 안에서 아이는 엄마와 함께 씻고, 먹고, 자면서 일상을 보냈다. 엄마는 아이에게 계란껍질로 뱀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종이로 만든 장난감으로 같이 게임도 한다.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TV인데 아이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지 못해서 세상 밖을 욕망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그저 문을 열면 망망대해 같은 우주가 있고 산과 바다와 동물들이 둥둥 떠다닌다고 상상한다. 엄마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일까. 아이는 납치라는 끔찍한 현실 위에 존재하는 열악한 방 안에서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어른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에게는 방의 ‘크기’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 방의 크기와 행복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는 어른들의 세계에만 존재한다. 아이는 방이 좁든 넓든 그 안에서 보내는 엄마와의 시간들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집이 좁고 답답했던 시절 나는 하루라도 빨리 전업주부 생활을 접고 돈을 벌고 싶었다. 아이에게 넓은 방을 주고 좋은 물건들을 채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다. 어떤 선택이 맞을까. 아이가 어릴수록 넓은 집보다는 엄마 품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좁은 방 안에서도 아이의 우주는 충분히 반짝인다.

이정미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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