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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무엇보다도 ‘나’에게 이롭도록

입력
2016.04.1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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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하는 선택을 보면 알게 된다. 가령 다소 불편하더라도 윤리를 지키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어떠냐며 어기면서 살 것인지, 이 중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감 잡을 수 있게 된다. 하여 선택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기 본모습을 드러내는 행위이기에 늘 신중해야 한다.

더구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따르는 ‘탐리적(貪利的)’ 존재다. 성리학의 영향이 지대했던 우리는, 지난 시절 내내 사람의 이러한 본성에 ‘악’이라는 멍에를 씌우며 부인해왔다. 성리학에선 사람을 본성이 선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선함과 이익 추구가 상충되는 것이 아님에도, 또 선함을 기리는 이유가 그것이 이롭기 때문임이 분명함에도, 성리학이 악이란 딱지를 붙인 까닭은 사람도 생물인지라 본능적으로 물질적 이익에 쉬이 매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사람의 엄연한 본성으로 인정하자는 이가 있었다. 우리에겐 법가(法家) 사상의 집대성자로 알려져 있는 한비자(韓非子, ?~233 BC)가 바로 그다. 흔히 법가하면 권모술수 등 비인간적 면모가 주로 언급된다. 법대로 한다는 명제에선 싸늘함이 물씬 풍기기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성리학자들에게 구박을 받아서 생긴 오해가 결코 아니다. 실제로 법가는 사람을 또 세상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람이나 세상에 도덕의 옷을 덧씌우지 않았다. 선악의 잣대를 넘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응시했다.

그들이 보기에, 사람을 비롯하여 자연 만물은 타고난 그대로 존재하며 행할 따름이었다. 이를 두고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하는 건 그저 사람의 오만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연이 정해놓은 법칙에 의거해 타고난 본분대로 살아가고 존재한다. 토끼는 왜 우린 허구한 날 잡혀 먹히기만 하냐며 불평하지 않으며, 소나무는 왜 우린 알록달록 치장 한 번 못하고 평생을 사냐며 투덜대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타고나길 생존에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분에 문명도 일구고, 알량한 물리적 능력으로 만물을 지배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품은 욕망의 총합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재화의 총량보다 같거나 적으면 문제될 게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욕망의 총합이 재화의 총량을 훨씬 상회했다. 한비자가 문제 삼은 대목이 바로 이점이었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면, 그건 생존에 필요한 탐리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정해놓은 본분 이상을 탐하는 바로 그 속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비자는 본분을 넘어서는 욕망을 구조적으로 제어하는 사회 시스템을 구현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적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자연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은, 만물이 타고난 자리에 서서 주어진 직분 이상을 욕망하지도 않고, 직분 이하로 게을리 하지도 않기에,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하게 된 시스템이었다. 그가 보기에 자연에 상존하는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았다. 토끼가 맹수로부터의 위협을 감수하기에, 또 맹수는 필요 이상으로 토끼를 잡아먹지 않기에, 자연은 큰 틀에서 평형을 이루며 영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 사회를 그와 같이 시스템화 할 수 있다면, 그는 과도한 욕망으로 인한 폐해를 원천적으로 해소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여 자연을 판박이 한 사회 시스템을 제안했다. 사람들에겐 그런 시스템의 일부로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난 자리에 주어진 직분만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갈 것이 요구됐다. 평민은 평민의 자리에서, 관리는 관리의 자리에서 또 군주는 군주의 자리에서 그 자리에 요구된 바, 그 이상을 또 이하를 욕망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이를 위해선 사람의 탐리적 본성을 인정해야 했다. 이를 악하다며 억제하면, 주어진 직분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곧 자연처럼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한도 내에서 사람의 이익 추구 본성을 긍정한 셈이었다.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한비자의 구상을 평가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때가 때이니만큼 사고실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한비자가 그린 사회가 정말로 현실에 구현되어 있다면, 그런 사회에서 행해지는 선택은 과연 무엇을 드러내줄지, 겸하여 지금 우리의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한비자가 꿈꾼 사회에서 드러나는 본 모습은 그래도 자연을 닮았다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듯싶다. 그 사회는 자연을 닮은 시스템이요, 사람이 자연 속 사물처럼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최소한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나’에게 이롭도록 선택했다는 평가가 가능할 듯하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자화상엔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이 밤이 지나면 그 답변을 구성해볼 수 있으리라.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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