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의 일상 속 자연 누리기(10)

요즘 서울 근교 숲 속엔 봄꽃들이 앞 다퉈 피고 있다. 산동백이라고도 하는 생강나무 꽃이 노랗게 피어 알싸한 향기를 내뿜고, 연분홍 색감 고운 진달래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낙엽 사이로는 노랑제비꽃, 현호색, 괴불주머니, 노루발풀 꽃이 지천이다.

3월 말 4월 초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괴불주머니(왼쪽)와 현호색(삼성 NX1).

하지만 대부분 나뭇가지들은 아직 겨울 모습 그대로여서 숲 전체로는 여전히 삭막해 보인다. 그런데 벌써 숲 군데군데 파랗게 잎을 틔운 나무가 있다. 보통 버들 종류가 일찍 잎이 피므로 버드나무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귀룽나무다. 벚나무 등과 함께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이름은 생소하지만 우리 주변에 늘 있어온 나무다.

요즘 서울 근교산을 오르면 계곡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아직 겨울 모습 그대로인 나목 사이로 파랗게 잎을 틔운 게 바로 귀룽나무다(삼성 NX1).

3월 하순부터 싹을 내기 시작하니 숲 속에서 가장 부지런한 나무다. 예부터 조상들은 이 나무가 잎이 피기 시작하면 농사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농사철 시작을 알리는 지표목 역할을 한 것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에도 귀룽나무가 많은데, 농사를 중시했던 임금들이 농사철을 알기 위해 일부러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귀룽나무 새잎(삼성 NX1).

왜 귀룽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구룡목(九龍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그럴싸하다. 벚나무와 생김새가 비슷한 이 나무는 가로로 줄 무늬가 있는 벚나무와는 달리 흑갈색 수피가 세로로 갈라지는데, 그 모양이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해 구룡목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게 변해 귀룽나무가 됐다는 얘기다.

버드나무처럼 물기를 좋아해 산 계곡 부근에 많은데, 꽃 필 때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연녹색 잎이 충분히 자란 뒤 4월 하순에서 5월 초쯤 흰 꽃이 핀다. 산벚꽃 질 무렵이고, 아까시 꽃 피기 2주쯤 전이다. 우람하게 자란 나무 전체가 흰 꽃으로 덮인 모습은 장관이다. 특히 연녹색 잎과 흰 꽃이 잘 어울려 수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또 그 모양이 뭉게구름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북녘 땅에서는 구름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귀룽나무 꽃. 연녹색 새잎과 흰꽃이 어울려 수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지난해 4월10일 서울 사당동 한 아파트 녹지에서 촬영).

서울인근 북한산이나 청계산, 남한산 계곡에는 수형이 웅장한 귀룽나무 거목들이 많다. 4월 말 5월초 등산에서 귀룽나무 꽃과 향기는 놓쳐서는 안 될 감상 포인트다. 춘천의 제이드가든 수목원에는 100만 달러짜리 귀룽나무가 있다. 실제로 나무 값이 100만 달러가 아니고 50년쯤 된 이 나무의 수형이 아름다워 그렇게들 얘기한다.

귀룽나무 꽃송이는 아까시 꽃과 비슷하다. 하지만 밑으로 향하는 아까시와는 다르게 끝부분이 라일락처럼 하늘이나 옆으로 향한다. 언뜻 흰 포도송이가 거꾸로 달린 것처럼 보인다. 향기도 아까시와 많이 다르다. 진하게 흘러나오는 향기가 어찌나 그윽한지, 나무 주변에 한참 동안이나 발길이 머문다. 대목 만난 꿀벌들도 잉잉거리며 꽃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귀룽나무 꽃에는 꿀이 많아 밀원 식물로도 각광을 받는다.

향긋한 꽃 향기와는 달리 어린 가지를 꺾으면 고무 타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는 파리들이 매우 싫어하는데, 어린 가지를 꺾어 재래식 화장실에 넣으면 구더기를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시골에서는 귀룽나무 가지 외에도 오동나무 잎이나 멀구슬나무 잎을 재래식 화장실 구더기 방제에 사용해왔다. 이 나무 가지를 꺾어 벌통 주변에서 흔들면 벌들이 맥을 못 추며 순해져 꿀벌 관리하기가 한결 수월하다고 한다. 나무껍질에서 나는 정유 성분이 벌을 얌전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한다. 듬성듬성 작은 포도송이처럼 달리는 열매는 버찌와 닮았고 7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새들이 특히 좋아해 유럽에서는 이 나무를“bird cherry"라고 부른다고 한다.

7월에 까맣게 익어가는 귀룽나무 열매. 새들의 좋은 먹이다(네이버백과사전).

귀룽나무에 이어 화살나무, 회잎나무, 참빗살나무, 딱총나무 등 작은키나무와 찔레 줄기도 일찍 잎을 피우는 나무에 속한다. 숲속의 작은키나무들은 큰 키 나무들이 우거져 햇볕을 가리기 전 이른 봄에 영양분을 만들기 위해 서둘러 잎을 피우는 것이다.

이 가운데 화살나무 종류 잎은 이른 봄 숲 속에서 가장 먼저 채취할 수 있는 산나물이다. 보통 홑잎나물 또는 혼잎나물이라고 부른다. 살짝 데쳐 된장이나 국간장, 소금간을 해서 무치면 매끈매끈한 식감이 기막히게 좋다. 어린잎을 그늘에 말리거나 녹차처럼 잎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는데 이게 귀전우(鬼箭羽)차다. 최근에는 화살나무가 혈당을 내리고 면역력을 높이며 항암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건강도 좋지만 무작정 섭취한다고 좋기만 할 리 없다.

화살나무 새잎. 이른 봄 가장 먼저 채취하는 산나물로 홑잎나물, 또는 혼잎나물이라고 부르는데 봄나물 중 으뜸으로 치는 사람들이 많다(삼성NX1).

화살나무에는 화살 깃처럼 코르크 날개가 있어 화살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른 봄 새 잎이 나면 겨우내 싱싱한 먹거리에 굶주린 동물들에게 많이 뜯어 먹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씹기 힘든 코르크 날개를 만들어낸 것이다. 신기하게도 동물들의 키가 닿지 않을 정도로 자라면 코르크 날개도 사라진다. 식물들의 지혜가 참으로 놀랍다.

한국일보 정치부에는 강원도 철원 출신의 전혼잎 기자가 근무 중이다. 혼잎나물을 유난히 좋아하신 부모님이 화살나무잎처럼 부지런하고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라고 이런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혼잎나물 사랑이 자식사랑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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