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천일야화] 3. 역사서 속 위인, 21세기에 살다

경상북도 실크로드 탐험대원인 이희정씨가 중국 산둥성 적산법화원 장보고 장군 동상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다.

“21세기 중국땅에 왠 신라인?”

2013년 3월26일 오전 중국 산둥성 롱청시 적산법화원. 붉은색 단복을 입은 경상북도 실크로드탐험대원 70여 명이 찾은 이곳은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연 신라 장군 장보고의 중국 교두보였다. 대원들은 높이 8m의 장보고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항상 아쉬운 것이 사진이다. 나도 정신 없이 셔터를 눌러댔지만 “장보고가 왜 이곳에?”라는 궁금증은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짧은 상상력으로는 이름조차 생소한 중국 바닷가 동네와 청해진을 연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해 밤바다를 직선으로 건너 중국 땅이다. 지금이야 물어볼 것도 없이 직선항로지만 삼국시대만해도 서해를 가로지르는 것은 모험이었다. 육지를 끼고 서해안을 따라 요동반도로 돌아가는 연안항로가 안전했다. ‘삼국사기’에도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간 김춘추가 연안항로로 귀국했다고 나와있다. 그 바다를 단숨에 가로지른 중국땅에서 신라와 신라인을 만났다.

장보고 동상 앞에서 당시 영양군청 공무원이었던 이희정씨가 셀카를 찍고 있었다. 오른손엔 스마트폰, 왼손에는 직전 장소에서 찍었던 사진 한 장. 알고 보니 그는 출발 첫 날부터 이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답사 도중 들렀던 모든 장소가 담겨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즉석 현상기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30대 중반의 그는 GPS 측정기도 휴대하고 있었다. 목적지인 시안 장안성에 도착하던 날, 답사 코스를 통째로 좌표에 담고 있던 그에게 물어봤다. “GPS에 얼마 찍혔어요?” “5066입니더.”그랬다. 경주에서 시안까지 5,066㎞를 죽자고 달렸던 것이다.

적산법화원의 건립자는 역시 해상왕 장보고였다. 820년쯤 중국 무녕군 군중소장으로 있다 퇴역한 그는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했다.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그가 적산법화원에 머물던 840년경에는 2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강당과 30명의 승려가 기거할 수 있는 승방, 불경을 보관한 장경각, 식당 등이 있었다. 법화원 소유 부지가 40만㎡는 될 것으로 추정했다.

장보고가 820년대에 이곳에 적산법화원을 세운 것은 해상활동의 안전과 신라인의 결속유지 때문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당시 해적이 들끓던 동북아 바다를 평정, 해양 실크로드를 열었다. 신라 왕실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췄던 그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이려다 실패했다. 결국 왕위쟁탈전에 가담하다 자객 염장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됐다.

적산법화원은 당 무종의 사찰철폐령으로 844년 헐렸다. 그 후 세월 속에 잊혀졌다 엔닌 선양사업을 추진한 일본인에 의해 1988년 중건됐다. 이곳 장보고기념관은 한중수교 후 별도로 지어진 공간이다.

동국대 김복순 교수가 중국 양저우 최치원기념관에서 동슈에(왼쪽) 관장에게 모형 신라금관을 선물로 주고 있다.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소로 불리는 한인사회의 옛 흔적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버스는 달린다. 칭다오와 렌윈강을 거친 탐험대원들은 양저우에 있는 최치원기념관을 빠트릴 수 없었다. 1층에는 좌상, 2층은 전시실이었다. ‘천년의 기억을 뛰어넘어-최치원과 양주’라는 우리말이 일행을 반겼다. 우리나라에서도 만난 적이 없는 최치원기념관을 중국에서 보는 느낌은 각별했다. 2007년 10월 문을 연 이 기념관은 중국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허가한 외국인 기념관이라고 한다.

동국대 김복순 교수가 동슈에 최치원기념관장에게 신라금관 모형을 선물로 건넸다. 동슈에 관장은 우리나라를 여섯 번이나 다녀간 지한파였다. 중국인의 입을 통해 최치원의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치원은 열두 살이던 868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6년 만에 당이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그의 ‘토황속격문’을 읽은 황소가 놀라서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스물 여덟에 귀국한 그의 개혁정책은 중앙 귀족의 반대로 좌절됐다. 당에서는 이방인, 신라에서는 육두품의 신분이 걸림돌이었다.

지장보살인 김교각의 등신불이 있는 중국 구화산 육신보전.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수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는 그 도시들도 지났다. 하지만 그 좋다는 서호도 스쳐 지나갔고 황산도 건너 뛰었다. 오로지 실크로드만 찾아나선 길이었다.

밤 12시에야 안훼이성 구화산에 도착했다. 해발 1,352m의 구화산에 오른 것은 순전히 신라왕자 김교각(696∼794) 때문이다. 신라 33대 성덕왕의 장자 김수충으로 알려진 그는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나 당나라행을 선택했고, 법명을 지장이라고 하고 구화산에서 정진했다.

이곳은 중국에서도 4대 불교성지 중 한 곳이었다. 산시성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쓰촨성 아미산에는 보현보살, 저장성 보타산에는 관음보살, 그리고 구화산에는 지장보살 김교각이 있었다.

이곳이 다른 성지와 다른 것은 등신불 때문이다. 아흔 아홉에 열반한 김교각의 시신은 3년이 지나도 부패하지 않고 멀쩡해 금을 입혀 등신불이 됐다. 등신불이 모셔진 육신보전 안에는 7층 석탑이 있고, 그 안에 3층 목탑이 있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등신불이 있는 곳이다.

향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 이곳 구화산에는 지금도 등신불의 전통이 이어오고 있었다. 이곳 통혜암에에는 1991년 가부좌한채 열반한 자명 스님의 등신불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옆에 보니 은은하게 웃고 있는 비구니의 사진이 걸려 있다. 등신불과 사진을 비교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었다.

김교각 스님을 필두로 구화산에서 탄생한 등신불은 모두 15존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때 5존, 현재 볼 수 있는 등신불은 7존, 비구니로는 자명 스님이 유일하다. 이곳 등신불은 약물 처리를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과서에서 소설가 김동리의 ‘등신불’을 공부했던 우리 세대에게 김교각은 각별한 존재다. 그 주인공을 이곳 중국땅에서 만날 줄이야. 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신라인과 만난 느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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