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기독교 구약 경전 ‘전도서’에 나오는 말인데, 이 말이 맞는 거라는 걸 요즘 절감한다. 곧 닥친 총선을 앞두고 사람들이 각자의 정치적 염원을 담은 말들을 쏟아 내고 있는데 내 귀에는 다 이미 30여년 전에 들었던 얘기와 똑같아서 지겹다. 예컨대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든가 “4월 13일 이변을 기다린다” 등은 이미 1987년에 회자되었던 ‘선거혁명’이라는 슬로건의 변종에 불과하다. 우리는 속았고 지금도 속고 있다.

지난 여러 번의 선거와는 달리 이번 총선은 여야 모두 각각 분열된 채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외관과 가상에 사로잡힌 관찰이다. ‘진박’ 내지 ‘친박’ 사람들은 유승민 후보 등에게 박대통령의 ‘어진(御眞)’을 돌려달라며 다투고 있지만(진박의 정치적 정서를 강조한다면, ‘존영’이 아니라 ‘어진’이 맞다), 어차피 유승민은 당선되어서 새누리당으로 돌아갈 사람이다.

만약 안철수가 더민주당을 탈당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달라졌을까 라고 상상해 본다. 그랬더라면, 각 지역구에서는 여야가 일대일 대결 구도를 만들게 되었을 것이고, 민주적이고도 개혁적인 유권자는 야당 후보에게 투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비례 투표에서는 느긋하게 정의당이나 노동당이나 녹색당에게 표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그렇지 않다.

투표해서 세상을 바꾸자는 얘기는 아주 잘못된 거라고 나는 판단한다. 경사진 축구장의 아래쪽에 자기 골문을 두고서 경기를 하면서 선거 결과에서 막연히 이변을 바란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분당 사태 이후 이번 선거는 망치기 시작했고, 필리버스터링을 중단하면서 패배해버렸다.

표심에 관한 여론조사가 요즘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바로 ‘박빙’이다. 이 박빙이란 말은 선거를 지배 체제의 단순한 재생산 장치로 만드는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것은,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여러분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국민들을 속이는 장치일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바로 드러나겠지만, 대한민국의 주인은 따로 있다. 머슴인 흙수저들을 잠시 속이는 게 선거인 것이다.

박빙이란 말은 마치 선거에서의 주체적 판단과 선택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그 말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선거를 기다리게 만들고, 투표를 하게 만들고, 또 선거를 통해 성립될 지배 체제에 순응하게 만든다.

근대 사회를 합리성으로 요약하고 합리성이란 주술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라고 말한 이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 합리성으로부터 먼 상태와 수준에 놓여 있다. 1원 1표인 주식회사 제도보다 1인 1표인 선거가 더 좋은 제도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구조적으로 야권만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에게 현명한 선택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혜안이, 그러니까 정치적 혜안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크게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흙수저로서 월세방을 전전하며 살게 될 것이고 취직은 하지 못한 채 지겹게도 백 살까지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선거만으로 배부르지 않다.

심술궂게 들리겠지만, 분명히, 선거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선거란 “투표만 하고 가만히 있으라”라는 것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선거란 예컨대 촛불 시위를 못하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물대포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될 시위는 그만 두고 다음 선거 때 투표나 잘 하라는 식인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세월호의 비극이 너무 처절하게 잘 보여주었다.

판판이 선거 때마다 속아 왔으면서도, 다시 ‘선거 혁명’ 운운하며 정치적으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자. 그런데,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이 글이 결과적으로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만 도움이 될 거라고 잘못 판단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노파심에서 덧붙이건대, 그런 분께는 최근 화제가 된 이승만 찬양시를 읽듯이 이 글을 다시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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