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김월회 칼럼] 인간의 길, 가축의 길

입력
2016.03.31 13:36
0 0

“나에게는 태어날 때 이미 만물이 다 갖춰져 있다.” 맹자의 말이다. 바로 다음엔 “돌이켜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보다 큰 즐거움은 없다”는 말이 나온다. 나에게 정성을 다하면 곧 만물에 정성을 베푸는 것이 되니 이보다 큰 즐거움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간은 하늘처럼 위대해진다. 만물을 품고 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는 존재는 하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어떤 이는 만물을 담을 수 있는 ‘나’에게 지옥을 담기도 한다. 그로도 모자라면 함께 사는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힘이 있어서 그렇다. 마음에 품은 바를 사회적으로 펼쳐낼 수 있는 그런 힘 말이다.

하여 그들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여긴다. 마음을 집중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자기 염원을 이뤄준다고 믿는다. 우주 삼라만상을 자기 중심으로 돌리는 절정의 경지에 올라섰음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대상을 악하다고 규정하면 그 대상은 정말로 악해야만 한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그 대상을 악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책상을 탕탕 치며 혼내기도 한다. 그들이 보기에 자기 뜻을 따르지 않는 존재는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유형은 자기 마음에 들어앉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인간이기에 행하는 성찰은 ‘루저’나 ‘흙수저’의 몫이라 강변한다. 대신 누가 봐도 악이지만 자신이 품으면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이익만 지킬 수 있다면 전쟁 같은 거대 폭력도 그들에겐 쏠쏠한 선택지가 된다. 더구나 전장에는 루저나 흙수저들을 내보내면 그만이다. 그들은 단지 틈날 때마다 대결과 증오를 조장하고, 전쟁이 아니면 우리가 당한다는 공포를 증폭하기만 하면 된다.

저 옛날 맹자의 일갈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영토를 늘리려 전쟁한다면서 사람을 죽여 온 들판을 가득 메운다. 성을 차지하려 전쟁한다면서 사람을 죽여 온 성에 가득 채운다. 이는 온 땅에 사람고기를 먹이는 것이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자기가 갖고 싶은 땅과 성의 먹이로 사람을 썼다는 절규다.

그가 반전(反戰)론자여서 이런 말을 했음이 아니다. 그의 일갈은 춘추시대 이래 자기 당대까지, 4백여 년 간 수없이 치러진 전쟁 중 ‘의전(義戰)’ 곧 의로운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는 비판의 일부였다. 다시 말해 그도 의로운 전쟁은 긍정했다는 것이다. 그럼 의로운 전쟁이란 무엇일까. 그건 옛적 성현들처럼, 군주의 폭정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피치 못하게 벌이는 전쟁을 가리킨다. 전쟁이기에 숱한 생명이 어쩔 수 없이 살상되지만, 그 죽음으로 도탄에 빠진 천하가 구제되기에 의롭다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에 비춰보면, 자기 이익의 유지나 극대화를 위한 전쟁은 자기 욕망을 위해 사람을 먹이로 쓴 것에 불과하다. 근대중국을 대표하는 노신(魯迅)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당신은 저 돼지를 보지 못했는가? 도망치려 길길이 날뛰어도 결국은 붙들릴 수밖에 없으니, 그런 몸부림은 공연히 힘 빼는 것에 불과해’라고. 죽는다 해도 양처럼 그저 순순하게 굴어 피차 힘 빼지 말자는 뜻이다. 하지만 그대는 저 멧돼지를 보지 못했는가? 송곳니 두 개로 노련한 사냥꾼도 도망치게 한다. 그런 송곳니는 돼지우리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얼마 안 있어 길게 나온다.”

야생 또는 가축, 어느 쪽으로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신체는 그에 상응하여 변이된다는 것이다. 가축의 길, 그러니까 남들이 키우는 대로 순응하다 먹이가 되는 삶을 선택하면 멧돼지라도 송곳니가 나질 않는다. 반면에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야생의 길을 선택한 집돼지에겐 송곳니가 우뚝 솟구친다. 마음은 그저 하늘을 품고 지옥을 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처럼 신체의 변이를 실질적으로 추동한다.

사회는 시민 개개인이 결합된 집체(集體) 곧 집합적 신체이다. 하여 시민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사회란 신체도 변이될 수 있다. 집돼지는 수천 마리라 할지라도 사료를 주며 가둬두면 고분고분 일생을 산다. 멧돼지는 그와 달리 대여섯만 모여도 큰 산을 주름잡는 맹수 무리가 된다. 마음먹기의 차이가 개체의 신체 변이를 넘어 집체의 변이도 추동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단처럼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 모두가 고귀한 덕을 품으면 사회 전체도 고귀한 덕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노신은 “사람이 자기가 자기 입을 때릴 정도로 망가졌다면,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 입을 때리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다”고 했다. 인간이면서 가축의 길을 간다면 그게 바로 스스로 자기 입을 때릴 정도로 망가진 상태다. 그러니 그럴 듯한 먹이를 주며 현혹하다가 필요하다 싶을 때 먹이를 받아먹는 입을 후려쳐도, 그들은 그러려니 하며 가축의 길을 계속 가고 만다.

때가 된 듯하다. 공약이란 그럴 듯한 이름으로 먹이를 흩뿌리다, 당선되면 입을 휘갈기는 그런 시절 말이다.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