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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분노의 정치학

입력
2016.03.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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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반동이 여러 선진 민주주의 나라의 정치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심지어 20년 전에도 주류 정치인 중에 지나치게 세계화된 시대가 초래한 불안과 불평등에 대해 단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대중을 선동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려는 인물이 있었다. 그때 로스 페로과 패트릭 뷰캐넌이 있었다면 지금은 도널드 트럼프와 마린 르 펜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결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은 소중하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 최고조에 이르렀던 세계화의 첫 시대에 지금보다 훨씬 심한 정치적 반발이 있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버드대 동료 경제사학자 제프리 프리든 교수가 그 역사적 증거를 잘 요약해놓았다. 프리든은 금본위제의 전성기 때 주류 정치인들이 해외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를 우선시하느라 사회 개혁과 국가적 정체성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정치인들은 두 개의 치명적인 방식 중 하나를 취했다. 파시스트가 국가주의적 주장을 택한 반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사회개혁을 택했다.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양자 모두 경제적 폐쇄로 나아갔고 상황은 훨씬 나빠졌다.

오늘날의 반발이 아주 오래 가진 않을 것 같다. 심각성을 논할 때 대침체기와 유로화 위기의 혼란은 대공황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선진 민주주의는 실업보험, 퇴직연금 그리고 가족혜택의 방식으로 광범위한 사회안전망을 만들었고 최근 차질을 빚고 있지만 계속 유지하고 있다. 세계 경제에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엔 없었던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무역기구(WTO)처럼 목적에 맞게 기능하는 국제 기구가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하나 있다.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처럼 극단적인 정치적 움직임은 대체로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나치게 세계화된 경제와 사회통합 사이의 갈등은 여전하다. 주류 정치 엘리트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그런 갈등을 무시하고 있다. 내가 1997년 책 ‘세계화가 너무 많이 진행됐나(Has Globalization Gone Too Far?)’에서 주장했듯 상품ㆍ서비스ㆍ자본 시장의 국제화는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범세계주의적이고 전문적이며 기술을 갖춘 그룹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려놓았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됐다. 정체성의 갈라짐, 국적과 민족성 또는 종교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체성의 갈등과 사회적 계급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득의 갈등이 그것이다.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두 가지 갈등 중 하나를 이용해 호소력을 끌어올린다.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는 정체성 정치학에 집중한다. 버니 샌더스 같은 좌파 포퓰리스트는 빈부의 격차를 강조한다.

두 부류 모두 분노의 대상이 되는 ‘타자’를 지목한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가? 당신의 일자리를 중국인들이 빼앗았기 때문이다. 범죄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가? 멕시코인들과 다른 이민자들이 범죄조직 간의 싸움을 이 나라에 가져와서 그런 것이다. 테러리즘? 그거야 당연히 이슬람교도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치적 부패? 대형 은행들이 정치 제도에 자금을 대고 있는 상황에서 뭘 기대하는가. 주류 정치 엘리트들과 달리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대중의 불행을 이런 용의자들 책임으로 쉽게 돌릴 수 있다.

물론 기성 정치인들은 오랜 기간 기득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조정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그들은 나태와 무력감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정치 경력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다.

기득권 정치인들은 침체된 임금과 늘어나는 불평등을 우리 힘으론 해결할 수 없는 기술발전의 영향력 탓으로 돌리려 한다. 세계화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법칙을 바꿀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 교육과 기술에 대한 투자처럼 그들이 내놓는 해결책은 즉각적인 효과를 보기 어렵다. 결실을 맺는다 해도 기껏해야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현실에서 오늘날의 세계 경제는 세계 각국 정부들이 과거 만들었던 명시적 결정의 산물이다. 그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서 그치지 않고 훨씬 야심차고 강제적인 WTO를 만드는 선택을 했다. 비슷하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같은 미래의 대형 무역 합의를 비준할지 여부도 그들이 선택할 것이다.

각국 정부들은 금융 규제를 느슨하게 해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도록 했다. 거대한 지구적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들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한 채로 유지되도록 한 것도 정부들의 선택이었다. 영국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 런던정경대(LSE) 교수가 저서 ‘불평등을 넘어’에서 지적했듯 기술의 변화는 정부 기관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또 정책결정자들이 기술적 발전의 방향에 어떻게 올바로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기술이 고용을 늘리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소외된 자들의 분노를 말해주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다. 사람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끌기도 하고 종종 위험한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희망의 여지를 주는 진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주류 정치인들은 잃어버린 토대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기술이나 멈출 수 없는 세계화 뒤에 숨어선 안 된다. 주류 정치인들은 반드시 대담해지려 노력해야 하고 국내와 해외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대규모의 개혁을 고려해야 한다.

역사의 교훈 중에 하나가 세계화로 인한 정신착란의 위험에 대한 경고라면, 다른 교훈은 자본주의가 수정 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시장 중심 사회들의 유통기한을 연장시키고 전후 경제 부흥을 이끌어낸 건 뉴딜정책과 복지국가, 브레튼우즈회의 통치 아래의 통제된 세계화였다. 이러한 성취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건 기존 정책을 살짝 땜질하고 작은 수정을 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제도적으로 급진적인 계획과 운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도파 정치인들이여, 이 점을 기억하시라.

대니 로드릭 미국 하버드 케네디공공정책대학원 교수ㆍ경제학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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