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풀 저 풀로 뭉개진 꽃밭에 튤립 촉이 혓바닥을 내밀었다. 배나무 자두나무도 꽃망울을 키우고 제 발아래 언 땅 녹은 물을 끌어올린다. 각자도생하며 고난의 시간을 견딘 동지들을 다시 만나듯 서로 기웃거리며 인사를 한다.

살갗 간질이는 바람을 마시며 쪼그려 앉아 막 올라오는 풀들을 쳐다보면, ‘자 우리 또 한 번 서로에게 주어진 날들을 살아보세’하는 낮은 것들의 풋 냄새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겨울 월동용으로 들여놓은 연탄 1,000장이 달랑달랑하다. 그 많은 연탄을 다 태우고 겨울을 났는데 연탄 값이나 하고 지낸 건지 피식 웃음이 난다. 전화를 걸어 연탄 200장을 주문했더니 거리가 너무 멀어 1,000장이 아니면 갈수 없단다. 남들은 농사준비를 하는데 나는 겨울준비를 하나 중얼거리며 연탄을 기다린다. 연탄만이 아니라 입담 좋고 친근감 있는 연탄가게 사장님도 기다린다.

누구나 자기가 오래있던 거처를 옮기면 낯도 설고 물도 설어 자신은 겸양지덕을 흉내 내고 타인에겐 은근한 호기심을 갖게 마련이다. 작년 가을에 연탄을 가져 왔을 때 굳이 괜찮다는 것을 마다하고 옆에서 거들며 첫 대면을 했다.

“뭐 하러 이런 외진 곳엘 왔니껴? 전망은 좋네예” 이렇게 말하면 “요즘 연탄가게도 많이 없어져서 사장님 돈 많이 버시겠네요?” 그러면 사장님은 “밥은 먹고 살지 만도 허리며 어깨며 골병 드니다” 연탄을 다 내리고 차를 돌리며 사장님은 자기도 한 2,000평 밭에 단호박 농사를 짓고 있는데 원두막도 있으니 한 번 놀러 오란다.

막걸리 한 병 들고 들길을 헤매다 사장님네 단호박 밭을 찾았다. 산자락 아래 넓은 밭에는 단호박 넝쿨이 서로 엉켜 꽃을 피우고 줄줄이 매달린 단호박이 선명한 줄을 그으며 익어갔다. 카세트에서 울리는 뽕짝 노랫소리를 따라가니 모기장을 쳐놓은 원두막에 팔베개를 하고 발을 까딱거리던 사장님이 벌떡 일어난다. 머리맡에 밀쳐놓은 막걸리 병을 당기며 “연탄 일이야 겨울 빼면 어디 있니껴, 그저 농사철에는 여 나와 이래 막걸리도 한잔 먹고 놀다가는 게 취미고 일이니더” 촉촉하게 기분 좋은 그가 불콰한 얼굴로 바라보는 단호박 밭을 따라보며 연탄을 나르던 초로의 검은 얼굴과 평화롭고 나른한 농부의 얼굴이 겹쳤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꽉 차게 사는 한 가장이 보였다.

그때 그의 입에서 이것이 마지막 호박농사라는 말이 나왔다. 오래한 연탄일로 몸이 많이 힘들어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어 그래도 수입이 나은 연탄 일을 계속하고 호박밭을 팔기로 했다는 것이다.

지난 가을에 거기까지 들은 나머지 얘기를 오늘 들어볼 참에 연탄가게 사장님을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연탄차가 왔다. 반갑게 수인사를 하고 둘이 연탄을 날랐다. “그래 호박밭은 파셨어요?” “팔았시더!”하며 이어가는 말이, 그게 땅을 팔면 일을 좀 줄이고 편하게 살려고 했는데 막상 땅을 팔고나니 허전하고 심심한 게 시간을 주체할 수 없더란다. 일 없고 몸 편해지니 전보다 더 큰 병이 들것 같더란다. 다시 땅 판 돈 도로 들고 땅 찾으러 다니는데 맘에 드는 데가 없어 팔아버린 땅이 아깝던 차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기 밭을 산 이가 도무지 귀농할 엄두가 안 나서 그 밭을 되판다고 내놓았단다. 그런데 그 사이 땅 값이 평당 5,000원씩 붙어버렸단다. “나도 미친놈이지 내가 팔고 한 철 만에 평당 5,000원씩 웃돈 주고 다시 그 밭을 사기로 했시더!. 이집 연탄 내려놓고 계약하러 갑니더. 그는 허허 웃고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연탄을 내리고 차를 돌리며 유리문 사이로 인사를 했다. “그럼 올 가을에 막걸리 사 들고 원두막에 놀러 가도 되겠네요?”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소!” 까만 연탄차가 씩씩하게 비탈길을 내려간다.

삶에 묵묵한 그의 어깨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면서도 웃음 끝에는 내가 결론지을 수 없는 그의 결정에 따듯한 동감을 보낸다. 누구에게나 타인이 무게를 달 수 없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다. 올 가을에 단호박이 필요한 친구들이 있다면 꼭 그의 원두막을 찾으리라.

지금 이 봄 들판에는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아파도 또다시 농부들이 흙을 일군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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