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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권태가 불러온 광기와 집착

입력
2016.03.1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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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작가 얄마르 쇠데르베리의 ‘닥터 글라스’(아티초크, 2016)는 20세기 초에 나온 소설이지만, 오늘 나온 신작이라고 해도 어색할 게 전혀 없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의사는 질병을 통해 죽음과 인간의 유한성을 고민하거나 병을 개별적 육체를 넘어선 사회의 은유로 사유한다. 티코 가브리엘 글라스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리외를 닮은 것도 아니다.

글라스는 의대에 다니던 시절 사랑하는 여인을 사고로 잃어버린 뒤,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서른세 살의 가정의(家庭醫)다. 가족이 일찍 죽거나 이민을 간 탓에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그는 돈을 저축해서 바닷가에 집을 짓고 노년을 보낼 계획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주치의로 있는 그레고리우스 목사의 부인이 찾아온다. 쉰일곱 살 된 그레고리우스 목사는 교구장 선거에 나갈 만큼 신망을 얻고 있는데, 첫 번째 아내와 사별을 하고 난 뒤 이십대 후반의 새 아내를 맞았다. 글라스를 찾아온 그레고리우스의 아내는 남편이 요구하는 성관계가 혐오스럽다면서, 남편이 심장 검진을 받으러 오면 건강을 위해 금욕을 하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내려 달라고 부탁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글라스는 낙태, 안락사, 이혼을 적극 용인한다. 그는 세 문제를 “우주 어딘가 상상의 장소에서가 아닌,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각자의 척도로, 각자의 신분과 조건에 따라 겸손하게,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척도로 그것을 측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이 나온 게 1905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작가의 옹호도 매우 급진적이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부부강간을 거론한 점이다. 글라스는 남편이 강요하고 아내가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한 번에 그치는 강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계속 진행 중인, 반복적인 강간”으로 규정한다. 그의 생각은 부부 사이의 성생활이 “하나님이 바로 그 한 여자를 통해 충족하라고 허락하신 자연발생적 충동”이며 남편의 “권리”라고 굳게 믿는 그레고리우스 목사의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레고리우스 목사는 의사의 충고를 따르는 시늉을 하지만, 자신의 특권과 쾌락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글라스는 각방을 쓰라거나 요양을 가야 한다는 자신의 방법이 미봉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목사의 부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필요할 때 쓰려고 제조해 두었던 독약을 목사에게 먹이는 것이다. 이런 줄거리는 사건의 의뢰를 맡은 탐정이 점차 의뢰자(여자)의 음모나 의뢰자가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수렁 속으로 함께 빠져드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를 뒤따르게 될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처럼 사건보다 사변이 강하다.

글라스는 몇 번이나 자신을 못생긴 남자라고 소개한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그의 서랍 속에는 “사랑 받지 못한다는 인식보다 더 사람을 축소시키고 비하하는 것은 없다”라고 휘갈긴 종잇조각이 몇 년째 굴러다니고 있다. 지금 그는 의뢰자인 목사부인에게 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살인을 결심했다고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사실이 있다. 남편과의 성관계가 고문이나 같다고 호소하던 젊은 목사 부인에게는 정작 미국으로 떠나자는 젊은 애인이 있다. 글라스가 하려는 일은 죽을 쒀서 개주는 일이 아닌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권태다. “내가 왜 행동을 갈구했지? 권태로운 생활을 탈피하고 싶었던 게 주된 원인일 것이다”고 실토한 것처럼, 주인공이 목사를 독살한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이다. 흔히 권태는 사람을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무기력으로 이끈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권태를 탈피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물에 편집광적으로 집착하거나, 어떤 행동이든 저지르게 된다. 그렇게 하여 권태에 빠진 주체는 세계와의 연관을 점점 잃게 되면서 무기력해지기보다 글라스처럼 고립되어 간다. 콜린 윌슨은 이 작품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첫 번째 문예비평서였던 ‘아웃사이더’를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에 바쳤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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