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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신록예찬

입력
2016.03.0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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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싹트는 이때일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1학년 1학기 교과서에 나왔던 이양하 선생의 수필 ‘신록예찬’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양하 선생이 말한 ‘이때’ 바로 봄이 왔다. 요즘은 봄이라고 하면 황사가 먼저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연하고 투명한 초록의 계절이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이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이양하 선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신록(新綠)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신록에는 정말로 특별함이 있는 것일까. 과학은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았다.

지난 2월 25일자 ‘사이언스’ 표지에는 키 큰 나무가 빼곡한 아마존 비숲(雨林)의 사진이 실렸다. 아마존 비숲은 밀림이니까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진녹색 한 가지일 것 같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울창한 숲의 숲머리(林冠)는 ‘신록예찬’을 읽을 때 상상했던 바로 그 초록빛의 이파리들로 가득했다.

‘사이언스’가 표지 기사로 삼은 논문의 제목은 ‘아마존 상록수림의 계절별 광합성량을 설명하는 잎의 성장과 어린 잎 비율’이다. 미국과 브라질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공동연구팀은 일 년 내내 울창한 아마존 비숲의 광합성 효율이 계절마다 다른 이유가 궁금했다. 광합성의 효율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측정하면 알 수 있다는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생명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건기에 아마존 비숲은 오히려 광합성을 더 많이 했다.

그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건기에는 구름이 적고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하늘이 맑아서 이파리들이 햇빛을 더 많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때 이파리의 수가 더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구팀은 이런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의심을 품는 것이 바로 과학이며 그것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바로 과학자다.

연구팀은 막연히 짐작만 하는 대신 측정을 하기로 했다. 연구팀은 아마존의 네 곳에 카메라를 달아서 숲머리의 이파리 색깔의 변화를 관찰하고, 이산화탄소 측정 센서로 광합성 양을 측정하였다. 그들이 발견한 사실은 간단했다. 건기가 되면 늙은 이파리는 떨어지고 새로운 이파리들이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산화탄소 흡수 효율이 높아진다.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보다 여린 이파리가 많은 나무가 광합성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열대 비숲이 지구온난화에 반응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모델을 바꾸었다. 아마존의 비숲이 1년 내내 초록빛을 잃지 않고 지구의 허파 노릇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건기에 광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이파리, 더 튼튼한 이파리로 무장해서가 아니라, 힘든 시기가 오면 늙은 이파리를 떨궈내고 그 자리에 신록의 이파리들을 틔우기 때문인 것이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 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 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천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양하 선생이 1937년 발표한 수필 ‘신록예찬’은 2016년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의 신록예찬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2016년 사이언스에 이파리에 대한 논문이 발표된 바로 그 시점에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필리버스터’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대국민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그 많은 의원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초반에 등장하여 단순히 시간을 끄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의원들은 김광진, 은수미, 박원석, 김제남, 김용익 의원 등 대부분 초선이었던 것 같다.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야당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북돋운 의원들은 노련한 정치 5단, 정치 9단들이 아니라 지역구도 갖지 못한 초선 비례대표 의원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야당의 신록이다.

필리버스터는 국회의 신록일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는 여당의 초선의원들의 멋진 필리버스터를 보고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야당이 친일재산몰수법 같은 것을 발의할 때 여당이 필리버스터라는 대국민 퍼포먼스를 벌이면 좋겠다.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정치를 우리 국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 여당과 야당이 번갈아가면서 철마다 필리버스터를 한다면 국회는 아마존 비숲처럼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다.

진달래가 필 무렵에 대학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한눈에 구별되는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의 발걸음을 보고만 있어도 힘이 난다. 대학 신입생은 신록이다. 딱 5주 남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젊은 초선의원들이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아마존 비숲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우리가 숨을 쉬는 데 중요한 것은 이파리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어린 잎이 많은가 하는 것이라고.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를 드릴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봄은 왔고 신록을 예찬할 때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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