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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의 시 한 송이] 쓸모없는 이야기

입력
2016.03.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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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통’ 아시지요? 어렸을 적 운동회에서 건네 받았던 흰 바통이 떠올랐는데, 그때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는 것이 신기한 아침이에요.

달려오는 친구를 보고 있었지요. 조금 전 친구의 바통은 저의 바통이 되었지요. 처음 잡아본 바통은 아주 가벼웠어요. 달리기는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바통을 떨어뜨리지 말아야지 하다 보니 저의 바통은 또 다른 친구의 바통이 되어 있었어요.

바통의 쓸모는 무엇일까요? 어떤 것에 쓸모라고 이름 붙여줄 수 있을까요? 종이에서 너의 두 귀까지, 이 목록에 시인은 ‘쓸모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어요. 제목과는 달리 읽을수록 촉감과 소리와 침묵과 색과 향기로 풍성해져요. 한 행 한 행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있어요. 종이와 펜이 만나야 질문이 생겨나요. 거룩함과 부끄러움은 푸른 앵두처럼 동일한 곳에서 발생하는 것들이죠. 이렇게 이어지게 읽어도 자연스럽죠. 크기와는 무관하게,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함부로 지우지 않는 풍경처럼요.

그럼에도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 목록들은 여전히 쓸모없는 것들이죠. 그렇다면 죽은 향나무숲에 비는 왜 내릴까요? 우리는 바로 불필요한 질문임을 알아차리죠. 자주 잊어서 그렇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쓸모없는, 더 정확하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움직임이 없다면, 서로 다른 두 밤에서 오늘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마저 없으면 진짜 무덤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이죠. 장미도 이 시간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가시가 함께 견뎌주고 있어요.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걸 거예요. 쓸모가 있으면 쓸모는 사라져요. 쓸모에 닿지 않아 쓸모의 간절함은 계속돼요. 쓸모부터 생각하면 두 귀는 열려 있어도 닫혀 있는 거예요. 햇빛이 나타나기 좋은 곳은 빈집이에요. 쓸모없는 목록을 만들어나가요. 쓸모에 함몰되지 않을 거예요.

시인의 이 목록을 바통으로 받을게요. 꼭 어릴 적 그 기분입니다. 꽃 한 송이처럼 눈 한 송이처럼 시를 읽어 주세요. 꽃도 눈도 붙잡을 수 없어 아름다워요. 쓸모없어 깨끗해요. 시도 닮은 얼굴을 갖고 있어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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