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 2030] '걸 크러쉬' 문화현상 확산

‘걸(Girl)+홀딱반하다(Crush on)’… 성적 감정없는 강한 호감 표현
“女아이돌 팬” 밝혀도 오해 안 사고 ‘롤모델’ 삼을 수 있어
걸 크러쉬 연예 프로에 나온 제시 패션ㆍ유빈 메이크업 인기
“남자가 조신하니 살림 좀 해야지” 김숙 ‘가모장 멘트’에 열광도
'숙 크러쉬'로 인기몰이 하고 있는 개그우먼 김숙. JTBC 님과함께2 최고의사랑 캡처

“언니들도 많이 보고 계신데 왜 항상 오빠에게 애교부려야 해요?” KBS ‘연예가중계’와 인터뷰하던 여배우 박보영이 당돌하게 되물었다. 남성 팬들을 위한 애교를 부탁했던 리포터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잠시 스쳤다. 박보영은 언니들에게 바로 애교를 발사했다. “언니!!!”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었건만 인터넷은 박보영의 애교로 후끈 달아올랐다. “맞다, 여성 팬들도 애교를 보고 싶었다” “왜 맨날 남성 팬들에게만 애교를 부려야 하느냐”는 말들이 줄을 이었다.

이제껏 ‘여성 연예인들=오빠와 삼촌부대’가 정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 열광하는 여성 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전에도 이런 현상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소수였고 잘 띄지도 않았다. 지금은 당당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밝히고 나선다. 이런 현상에 ‘걸 크러쉬’(Girl Crush)라는 이름이 붙었다. ‘걸’(Girl)과 ‘홀딱 반하다’는 ‘크러쉬 온’(Crush on)을 합친 말이다.

옥스포드 사전 “성적 감정 없는 호감”

한때의 유행어, 혹은 재미 삼아 지어낸 말 같지만 걸 크러쉬는 당당하게 옥스포드 사전에 올라 있다. 문구를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같은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일반적으론 성적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강한 호감 또는 감탄을 뜻한다.” 이 말이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건 2012년쯤이다. 화려한 입담으로 유명한 미국의 유튜버 제나 마블스가 “성적인 감정 없이도 같은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얘기를 풀어놓으며 걸 크러쉬란 표현을 썼다. 그러면서 세세하게 ‘친해지고 싶은 단계’ ‘닮고 싶은 단계’ ‘사랑하고 싶은 단계’로 나눠서 설명했다. 그 뒤 걸 크러쉬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건 예전에도 제법 있었다. 중ㆍ고등학생 때 선머슴 같은 아이들이 인기를 끌고, 서로간 관계를 두고 이런저런 싸움을 겪기도 한다. SES, 핑클 같은 원조 아이돌 걸 그룹들도 남성 팬 못지 않게 여성 팬들을 꽤나 끌고 다녔다. 다만 그 때는 뭔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이 있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설명하기가 막연했다. 바로 그 때 ‘걸 크러쉬’란 단어가 떡 하니 나타난 것이다. 시인 김춘수 표현에 빗대자면, 여자 연예인을 애정하는 마음을 ‘걸 크러쉬’라 불러주자 ‘걸 크러쉬’가 우리에게 와 꽃이 된 셈이다.

소녀시대 태연.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여덕’들 너도나도 자연스레 커밍아웃

대학생 이효진(25)씨는 “이제 여자 연예인을 좋아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씨는 “중학교 때만 해도 여자 연예인 누구 좋아한다고 하면 ‘여잔데 왜 여자연예인을 좋아해?’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럴 때마다 여자라고 해서 꼭 남자연예인만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닌 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회사원인 정수지(27)씨는 에이핑크가 데뷔하던 2011년부터 팬이었다. 당시만 해도 “에이핑크 팬”이라고 말하면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았다. “여자가 무슨 여자 아이돌을 좋아 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걸 크러쉬’라는 말이 돌면서 자신도 자연스럽게 팬임을 밝히고, 주변 사람들과도 ‘나도 멤버 중에 누가 더 좋다’는 얘길 자연스럽게 주고 받는다. 걸 크러쉬 덕에 ‘여덕(여성 아이돌 덕후)들의 커밍아웃’이 가능해진 셈이다.

걸 크러쉬 현상이 나타나는 건 무엇보다 여성 연예인에게서 더 친숙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돌이 이상적인 남자친구 같은 느낌, 그렇지만 현실에서 결코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라면 여성 아이돌은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 ‘워너비’에 가깝다. 또 미래에 도전하기 위한 ‘롤모델’ 역할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얼굴이나 몸매, 아니면 패션이나 화장, 또는 노래나 연기 같은 것들을 보고 ‘내 취향이다’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고 감정을 이입하기가 더 편하다는 것이다.

대학생 임지수(22)씨는 ‘소녀시대’를 좋아한다. “날씬한 몸매를 보면 닮고 싶고, 열정적으로 뭔가 하는 모습을 보면 따라서 하고 싶은 욕심도 생겨요. 또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해도 남자들은 잘 모르고 같은 여자들끼리 이해할 수 있는 유머나 고충 같은 것도 있어 좋아요.” 고등학생인 임지유(19)양은 걸그룹 에프엑스의 크리스탈 팬이다. 컴퓨터에 ‘다이어트 자극 사진 폴더’도 따로 만들어뒀다. “군살 없는 모습으로 예쁜 사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닮고 싶어요. 또 잘 웃지 않는 시크한 모습도 마음에 들고요, 무대 위에서 프로답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저의 롤 모델이에요.”

걸 크러쉬 배출 연예 프로도 잇따라

‘걸 크러쉬’ 연예인을 배출한 대표적 프로그램으로는 음악케이블방송 엠넷의 ‘언프리티 랩스타’가 꼽힌다. 지난해 시즌 1에서는 제시가 인기를 끌었다. 제시의 힙합룩, 찢어진 청바지, 큰 링 귀걸이 등이 ‘걸 크러쉬 패션’으로 인기를 끌었고, 제시가 썼던 베오프렌 소재의 모자 ‘백스’는 완판됐다. 지난해 하반기 시작된 시즌 2에서도 헤이즈와 유빈이 떴다. 짙은 아이라인에 눈썹 화장, 장밋빛 립스틱 등 ‘유빈 메이크업’이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에서 ‘걸 크러쉬 메이크업’이라 검색하면 2,000개가 넘는 동영상이 나온다. 회사원 조수경(23)씨는 “방송 다음 날 그들이 입었던 옷 같은 걸 모두 인터넷으로 찾아봤다”면서 “취향이 완전히 내가 원하는 바여서 완전히 걸 크러쉬됐다”고 말했다. 서로 디스하는 힙합은 거친 남성들의 싸움 같지만 역시 여성적인 코드가 곳곳에 숨어 있다. 조씨는 “아무래도 여자다 보니 남성 래퍼들의 디스나 쇼보다 여성 래퍼들의 디스나 쇼가 훨씬 공감하기 좋았다”고 말했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레아 세이두.

2014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등장한 배우 레아 세이두의 인기도 ‘걸 크러쉬’로 설명된다. 파랗게 물들인 짧은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등장한 세이두의 모습에 많은 여성들이 열광했다. 대학생 천민아(23)씨는 “가녀리고 연약하고 상냥한 여성미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역시 대학생인 류승주(22)씨도 “남성상이 다른 것만큼 여성상도 다양하다”면서 “당당하고 기가 센 사람 뿐 아니라 다양한 이들에게 걸 크러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걸 크러쉬의 매력이 외모나 화장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사상이나 행동에서 걸 크러쉬를 이끌어내는 이들도 있다. 요즘 ‘숙 크러쉬’라 불리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김숙이 대표적이다. JTBC ‘님과 함께 시즌 2-최고의 사랑’에서 개그맨 윤정수와 가상 부부 생활을 하고 있는 김숙은 남자가 밖에서 돈 벌어오고 여자가 집안일을 한다는 관념 자체를 바꿨다. 김숙이 밖에서 스케줄을 소화하고 돈을 벌어오면 집안 일은 윤정수가 한다. 이때 김숙이날리는 멘트가 예술이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남자가 조신하니 살림 좀 해야지.” “남자가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여자가 내려오라면 바로 내려와야지.”기존 가부장 프레임을 뒤집은 ‘가모장’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다.

여성들은 속이 뻥 뚫린다며 열광했다. 회사원 천효진(29)씨는 “우리의 신물 나는 가부장적 전통이 이제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요즘 김숙의 거침없는 발언을 보고 정말 통쾌했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끼리 모여도 김숙 이야기만 한다”면서 “여자들이 가려워하는 구석을 긁어주니 다들 시원하게 여긴다”고 덧붙였다.

엠넷 언프리티랩스타2에 출연한 유빈(오른쪽).

남성 아이돌에 비해 더 친숙하게 감정이입이 되다 보니 걸 크러시는 동지적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단순히 좋아하고 따라 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지켜주고 함께 하는 사이가 된다. 소녀시대 태연의 열애설을 함께 걱정해주고 복장 점검도 잊지 않는다. 프리랜스 조모(24)씨는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여자에게 더 상처가 될 수 있는 지 더 빨리 캐치해서 미리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성적대상화가 될 수 있는 콘셉트에 대한 걱정 등도 함께 한다”면서 “여성 연예인과 여성 팬은 단순히 스타와 팬 관계라기보다는 정말 아끼는 여동생이자, 언니이자 소중한 친구 같은 관계”라고 말했다. 팬들끼리의 동질감도 강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개인의 취향 영역이다 보니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팬으로 모이고, 그러다 보면 팬들끼리의 친밀함이 더 강화된다.

“이해 못하겠다”는 주위 시선 여전

그렇지만 아직도 외부 시선에서 완전 자유로운 건 아니다. 이효진씨는 “주변엔 아직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특이한 아이 취급하거나, 가끔은 성 정체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는 데 그럴 땐 좀 힘들다”고 말했다. 임지수씨도 “아무래도 왜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되고,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힘들다”면서 “당장 우리 부모님부터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걸 더 자연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남자들의 시선은 미묘하다. 이경수(25)씨는 걸 크러쉬를 큰 유행이라 여기지 않는다. “래퍼 제시나 치타 같은 이들을 멋있다 여기는 힙합 문화의 유행” 가운데 일부라 여기는 것이다. 이씨는 “걸 크러쉬는 개성이 점점 사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주류 문화에서 벗어나고 싶다거나, 평범하고 특이한 걸 좋아하고 싶다는 것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면서 “특히 비주류 문화의 일부로 힙합하는 이들의 스웨그(Swagㆍ으시대는 자아도취 행위)는 아이들이 접하기엔 꺼림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당당한 여성으로 대리만족한 뒤 스스로는 결국 소극적인 여성이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회사원 소상우(29)씨는 “당당한 여자가 좋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연약하고 가녀린 여성 쪽으로 돌아서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에프엑스의 크리스탈.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반면 대학생 박기수(24)씨는 “힙합을 하거나 남성미 넘치는 여성 연예인들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가녀린 여자 아이돌에게도 그런다는 걸 보면 정말 자기 스타일에 맞춘 이들에게 걸 크러쉬를 느끼는 것 같다”면서 “개개인의 취향이 다른 만큼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무분별하게 ‘걸 크러쉬’라 가져다 붙일 위험도 크고 연예인 따라하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찬반 논란은 있지만 걸 크러쉬는 대중문화 코드의 하나가 되어 앞으로도 확산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김다은 인턴기자(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4)

소담 인턴기자(서강대 프랑스문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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