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시간 흐를 땐 의미 알 수 없어

시간의 의미 확정 위해 끝은 꼭 필요

이제 사회적 삶의 공적 의미 확정할 때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는 말했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몽타주는 필름에 대해 죽음이 삶에 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실로 대학시절이 진행되는 동안은 무슨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때로는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파국을 걱정하느라 목전의 즐거움을 놓쳐 버리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스러운 나머지, 젊음이라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도록 바라보고만 있기도 한다. 그 불안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은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졸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2월 하순이 오면, 학생들은 졸업을 하고 캠퍼스를 떠나야 한다.

손에 든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아직 채 녹지 않았을 때, 나는 K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어느 날 손을 들고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공부해보신 결과, 잘했다 싶은 일 하나 하고, 후회스럽다 싶은 일 하나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당돌하고 건방진 구석이 있는 질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국내외 소설을 닥치는 대로 아주 많이 읽은 것은 잘했다 싶고, 철학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으로 못한 것은 후회스럽다. 다시 물었다. 읽으신 소설 중에서 최고의 것, 두 종만 추천해주십시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둘 다 반드시 다이제스트가 아닌 무삭제 완전본을 읽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 무렵 수업시간이 끝났다. 강의실 밖으로 따라 나가서 다시 물었다, 그 책들 다 원어로 읽어야 합니까. 이 사람아, 그걸 다 어떻게 원어로 읽나. 번역으로 읽어야지.

톨스토이나 프루스트가 인기 있던 시절은 아니었다. 나는 먼저, 어린 시절 계림문고 다이제스트로 읽은 기억이 있는, ‘전쟁과 평화’ 완역본을 찾아서 읽었다. 분량이 많았으나 재미있었고, 일종의 역사철학서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 덕분에 호화로운 시간 낭비의 맛을 아는 몸이 되었다. 정신의 사치에 입맛을 다시며, 나는 모아둔 용돈으로 정음사에서 나온 완역본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질을 샀다. 재미가 없어서 다 읽지 못했다. 그래도 졸업 이후 그 책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시간을 낭비했다. 젊음같이 귀중한 것을 ‘기꺼이’ 낭비해버리는 것은 나름 쾌감으로 가득한 일이었기에. 이제 시간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나머지, 급기야 머리에 탈모가 진행 중이고, 몸은 근육을 잃어버린 망국의 슬픔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제 자기만의 사적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쓸 때가 되었다.

실로 교수시절이 진행되는 동안은 무슨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반드시 닥치고야 말 사회의 파국을 예감하느라 목전의 연구를 놓쳐 버리기도 한다. 대학의 좌표에 대해 불안하고 학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스러운 나머지, 학생들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게 되기도 한다. 그 불안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은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교수에게도 졸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어느 2월 하순이 오면, 교수들은 정년을 하고 캠퍼스를 떠나야 한다.

21세기가 되자 K교수는 정년퇴임을 하고 캠퍼스를 떠났다. 떠나는 이에게, 후배 교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기자가 물었다. “자신 있고 겸손한 학자보다 자신 없고 무례한 학자가 많은 것이 대학 사회입니다. 인기교수나 정치교수는 예외 없이 허학자들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역사의식에서 나옵니다. 젊은 교수들이 주류에 서서 쉽게 인정받기보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비주류에 서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완강하게 걸어 나가기 바랍니다.”

파국을 넘어, 사회적 삶은 의외로 오래 지속된다. 사회적 삶이 지속되는 동안은 공적인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역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는 사회에 대해 죽음이 삶에 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제 이 사회가 경험한 공적인 시간에 대해 ‘전쟁과 평화’를 쓸 때가 되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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