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의 1번 주자로 나선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332분(5시간 32분)으로 1964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319분(5시간 19분, 본 회의 기준. 상임위 기준으로는 1969년 8월 29일 3선 개헌 저지를 위한 박한상 신민당 의원의 10시간 15분)을 넘어선 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쓴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기록 경신 기사를 쓰게 됐습니다. 기록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본질에서 빗겨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자꾸 시간을 체크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10시간 18분. 김 의원의 기록도 이 숫자 앞에서는 상대가 안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시간입니다.

24일 국회에서 10시간 18분 헌정사상 최장시간 기록으로 무제한 토론을 마친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유기홍 의원과 포옹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은 의원은 24일 오전 2시30분부터 야당의 세 번째 주자로 나서 연설을 시작해, 박원석 정의당 의원에게 바통을 넘긴 낮 12시 48분까지 쉬지 않았습니다. 특히 은 의원은 1964년 DJ가 한 필리버스터 내용(“내가 여기 서 있는 한 (김준연 자유민주당 대표를) 체포하지 못한다”)을 인용하며 “우리가 여기 서 있는 한 테러방지법은 통과하지 못한다”라는 말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은 의원은 “1973년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던 박정희 시절을 암흑시기라 부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다시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습니다.

은 의원은 “테러를 방지한다는 것은 테러행위를 처벌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런 테러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원인, 예를 들어서 빈곤, 불평등, 가난, 불만, 복지부재, 이런 조치가 같이 이루어질 때에만 한 나라, 혹은 지구촌이 평온하다고 믿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은 의원은 또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의견이 다른 사람 상당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며 “테러방지법은 테러방지라는 명분아래 국민인권을 침해하고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전례를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본회의장에서 조를 짜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지켜보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은 의원 발언 도중 발언 내용을 문제 삼으며 몇 차례 강하게 항의하며 충돌했습니다. 홍철호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는 오전6시25분쯤 은 의원이 복지사각 지대를 상징하는 세모녀 사건을 언급하자 항의했고, 같은 당 김용남 의원은 오전11시26분쯤 은 의원이 “테러방지에는 이렇게 열을 내면서 정작 일상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며 용역 폭력이 극심했던 유성기업 사례를 들자 본회의장 복도 중앙으로 나와 거세게 따졌습니다. 필리버스터 자체는 합법적인 의사 진행 방해이기 때문에 별다른 반박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들은 대신 “법안과 관련 있는 내용만 얘기 해야 한다”는 규정에 의거해 따져 물은 것입니다.

특히 김 의원은 은 의원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의장님, 안건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아니냐. 상관없는 이야기 계속 하고 있잖냐. 이게 안건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정갑윤 부의장에게 제지를 요청했습니다. 김 의원은 한동안 야당 의원들과 고성을 주고받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도 “아니, 말 같은 이야기를 해야 듣고 앉아있지”,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은 의원은 이에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건 동료 의원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사과하라”고 반발했으나, 김 의원은 “관련 있는 발언을 하라. 사과할 일 없다”고 맞섰습니다 은 의원은 “김용남 의원은 공천 때문에 움직이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며 “우리끼리라도 이러지 말자. 의견이 다른 사람한테 소리를 지르고 해서 어떻게 사회가 통합이 되겠나. 저는 사회 통합을 위해 민주주의적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4일 국회에서 10시간 18분 헌정사상 최장시간 기록으로 무제한 토론을 마친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자료를 챙기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어마어마한 시간을 버틴 은 의원은 본회의장 밖으로 나와 기자들과 만나 “과연 법안을 막을 수 있는지 최선을 다해보자,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며 “(만약)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포기 말자, 사람들이 포기 안 할 거라는 생각과 어떻게 살아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은 의원은 토론 도중 자신의 SNS에 지지자들이 남긴 글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는 ‘테러방지법이 원하는 건 국민에 대한 테러가 아닐까요?’ 등 수백 개의 의견을 일일이 소개했습니다. 이어 지난해 국정원 불법 해킹 의혹 사건과 관련해 캐나다 해킹연구팀의 연구조사보고서, 국정원 대선 개입사건 자료, 2001년 테러방지법안에 반대 의견을 낸 국가인권위원회 의견문, 프란치스코 교황의 테러 관련 연설까지 읽었습니다. 그는 ‘장시간 동안 무엇에 가장 의미를 두고 발언했느냐’는 질문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페이스북 댓글을 꽤 많이 봤다. 헌법 조문과 비교해 테러방지법이 헌법과 인권이 위반되는 조치라는 이야기를 꼭 해달라는 등의 이야길 대신 해달라고 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한 번 해보자’ 그런 생각이 가장 강했고 그래서 헌법 얘기하고 정치가 올바른 건지에 대해 (연단에서) 말하고, 테러방지법이 왜 문제인지 얘기하고 왜 직권상정이 문제인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췄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김광진 의원은 입술이 탓다고 하던데 저는 그것보다는 온몸이 아프더라”라며 “물리적 육체적 고문을 당해 본 사람들을 인터뷰했었다. 그 분들도 다시 떠오르고, 갑자기 내가 겪었던 어려운 상황들(도 떠오르고), 어제 해고됐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얼굴이 떠오를 때면 좀 힘들기도 하고 ‘더 해야지’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민주당 은수미의원이 24일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을 반대하면서 10시간 18분 동안 계속한 필리버스터 마친후 의사당로비에서 다리를 뻗고 쉬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박광온의원 페이스북 캡쳐

그 어마어마한 시간을 버텼던 은 의원은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다음은은 의원실 보좌관과 일문일답

의원님 뭘 좀 드셨나요

“하나도 못 드셨어요.”

지금 의원님은 어디 계시나요

“지역(경기 성남)에 있는 병원에 가셨어요. 몸 상태를 정확히 체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들어가시기 전에 얼마나 해보겠다고 하셨나요

“저희한테는 6시간은 견뎌야지 했는데. 앞서 어제(23일) 의원총회에서 제가 10시간 버텨 볼 테니 다른 의원들님은 5시간 정도는 버텨 주세요라고 하셨답니다.”

새벽에 입장하실 때 뵈니까 자료, 신문 이런 거 많이 들고 가시던데요

“A4 용지로 300 페이지 분량을 들고 가셨습니다. 주로 국정원 과거사 문제, 노동인권을 비롯한 인권탄압 문제를 다룬 정책자료집, 신문 기사 스크랩 한 것 등등 좀 챙겨 가셨죠. 그래도 그건 참고 자료일 뿐 지금까지 공부하고 의정 활동 하면서 보고 들은 거를 다 쏟아내려 하신 것 같아요.”

사실 은 의원의 몸은 정상 상태는 아닙니다. 은 의원은 1983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학교에서 제적됐습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 봉제공장을 다니면서 백태웅ㆍ조국 교수 등과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결성에 참여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92년부터 6년 동안 복역했습니다. 당시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분실에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소장과 대장 50㎝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결핵이 후두로 번져 한동안 말을 못했습니다. 1997년 출소한 뒤 다시 공부를 시작해 2005년 서울대에서 노동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 자문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2012년 5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은 의원의 후원회장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은 의원을 ‘강철나비’라 불렀습니다. 조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은 의원이 고문을 받고 감옥에 있을 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자의 슬픔'에 있는 '나의 어머니'라는 시를 자주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나비 얘기를 종종 했는데 평소 겉으로는 한없이 여려 보이고 눈물 많은 은 의원이지만 누구보다 심지가 굵고 강단 있기 때문에 '강철 나비'라는 별명을 만들어줬죠.”

나의 어머니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편 현재는 은 의원의 뒤를 이어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네 번째 주자로 연설 중입니다. 그리고 더민주에서는 유승희, 김경협, 최민희, 강기정 의원이, 정의당에서는 김제남, 서기호 의원이 무제한 토론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어제 2번 타자로 나선 문병호 의원 이후 국민의당은 추가 신청자가 없는 상태입니다. 설마 또 기록 경신 기사를 쓰게 되는 일이 일어날까요.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정민승기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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