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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당신의 기억은 소중합니다, 하루코

입력
2016.02.0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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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고향을 찾지 못한지 오래다. 특별히 명절이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설과 이어지는 어머니의 생신을 지난 20년 동안 거의 찾아 뵌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짠하다. 생활리듬 또한 일본에 익숙해져서 고향의 세시에 점점 멀어져 가고 무감각해진다. 심지어 작년에는 아버지 제사를 잊기도 했다. 돌아가신 지 이십년의 세월만큼이나 아버지와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지워진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 가끔 재일 시인 김시종을 다룬 다큐멘터리 ‘해명海鳴 속에서’를 본다. 거친 제주의 파도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김시인이 울먹이듯 부르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그가 아버지를 통해 배운 유일한 조선어 노래라고 한다. 김시종은 지금 일본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조선과 일본을 살다’라는 자서전으로 아사히(朝日)신문의 오사라기지로상(大佛次?賞)을 수상했다. 일제 강점기에 제주의 황국소년 김시종은 해방 후 조선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며 남로당 활동을 했다. 1949년, 4·3사건의 와중에서 부모가 마련해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김시종은 2000년 도쿄의 ‘제주도 4.3 사건 52주년 기념강연회’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4ㆍ3을 언급하지 않았었다. 불법체류(일본)와 4.3관련 수배자(한국)라는 이중의 굴레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국외추방을 피하기 위해서 임모씨의 명의로 영주자격을 획득했으며 한국적을 취득하면서도 호적에 이 이름으로 등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본명 김시종은 필명으로 사용되었다. 즉 4ㆍ3은 실존인물 ‘김시종’을 세상에서 말소한 것이다.

요즘 김시종은 개인사 회복에 집중하는 듯하다. 역사적 기록을 참조하면서 자신의 희미해진 기억들을 천천히 정리했고 그것들을 분단과 한일관계사에 부어서 역사화해간다.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자서전 ‘조선과 일본을 살다’는 그런 기록의 소산이다.

기억이 역사와 착종하여 슬픈 또 하나의 개인사가 있다. 다큐멘터리 ‘HARUKO’를 통해 재일 조선인 사이에 널리 알려진 가나모토 하루코. 본명 정병춘. 김시종과 같은 세대 제주 출신의 할머니. 남편에게 버림받고 3남4녀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한국어도 일본어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기억력이 비상하고 샘과 상술에 능해서 수난과 질곡의 삶에서 가족을 지켜냈다. 지금은 합법적이지만, 파친코 경품 매매로 경찰에 37번이나 체포를 당하면서도 질긴 삶을 이겨냈다.

다큐멘터리는 그녀의 장남이 조총련 영화제작소 촬영조수로 일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영상에 담은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아들은 어머니의 개인사를 통해 재일 조선인 1세의 삶을 기록한다. 개인사를 통해 역사적 기록에 새로운 시각을 던지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에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상술에 능하지 못해 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효자 장남이 유일하게 어머니에게 말대꾸를 하는 장면. 어머니가 일본에 언제 어떻게 왔느냐는 대화에서 하루코가 ‘징용’으로 일본에 왔다고 말하자 아들은 당황하며 어머니가 일본에 온 1920년대는 아직 징용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말이 안통하자 ‘역사적 자료’가 없다며 윽박지른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하루코는 ‘역사적 자료’라는 말에 위축되어 방으로 들어가 자는 척을 한다.

아마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과 같은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서도 만만찮게 왜곡된 경우를 허다하게 경험했듯이, 한 개인사가 기록된 역사보다 진실일 수도 있다. 또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었던 여성들의 역사라 해서 무시당해야 할 이유도 없다.

역사는 새로운 자료들과 만나 갱신을 거듭하는 것이며, 김시종의 자전적 글은 이를 방증한다. 하루코 할머니의 개인사는 그 역사적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 재일 조선인 1세들의 기록을 꼼꼼하게 재검토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영란 일본 니혼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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