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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 칼럼] 기득권과 생존권

입력
2016.01.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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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노동계를 기득권 집단으로 규정하고, 대국민 서명운동을 통해 국회를 외부에서 압박하는 낯선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기득권 집단이라는 공격적 수사는 보통 사회비판 세력들이 집권층을 향해 사용했던 것이며, 대국민 서명운동 역시 시민사회나 재야 등이 정부 정책을 반대할 때 주로 쓰던 전략이다. 이런 주객전도의 모습은 현 정부의 의회민주주의관 및 노동자관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즉 취업해서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이들의 대표들이 ‘이미 얻은 권리’를 고수하려는 집단인지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인류의 다수가 기업이나 기타 기관에 취업해서 임금을 받으며 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산업화가 이미 진행 중이던 19세기 초반에도, 그 진원지 유럽에서 조차, 인구의 대부분은 땅을 직접 일구며 사는 농민들이었다. 영국 등 몇몇 지역을 예외로 한다면,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농민 비중은 여전히 전 인구의 70~90%를 차지했다. 이 절대 다수의 인류는 공동체라는, 때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 삶에 안정성을 주는 테두리 내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살아오고 있었다. 우선 공동체는 농민들에 기본 생존권을 확보해 주었다. 전쟁이나 엄청난 인구압이 있던 시대를 제외하고, 그들은 땅을 붙여먹고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던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땅이 있었고, 어떤 이는 남의 땅을 빌렸지만, 그들 모두 토지 경작과 그 곳에서 나오는 수확물에 일정 정도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이를 테면, 지주는 땅을 빌린 농민을 계약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 땅들이 특정 농민의 가계에서 대대로 경작해 온 것이었기에, 그리고 공동체가 이를 전통으로 함께 믿고 있었기에 그랬다. 또한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에 대한 부조와 구호 작업도 맡았다. 물론 공동체가 항상 따뜻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공동체는 나름의 규약과 관습을 어기는 이들에게는 엄격하고 때론 잔혹하기까지 했다. 훗날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기구라고 외쳤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다.

19세기 초반 이후 200년 동안, 인류가 사는 방식은 이런 공동체로부터 멀어져 갔다. 우리가 산업화로 표현하고 때로는 근대화라는 용어로 포장했던 변화로 인해, 인류의 대부분은 기업이나 기타 기관에 개별적으로 취업해서 임금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의 경제생활 영위 방식은 과거의 농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농민들은 그들이 경작하는 땅과 수확물에 대한 권리를 집단적으로 확보하고 있었지만, 취업자들은 자신이 매일 직접 만지는 기계나 설비, 사무기기 등에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이것들은 그 기업 소유주들의 개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취업자들은 자신이 일한 결과로 생산된 완제품들에 대해서도 권리가 없다. 대신, 그들은 직장 내에서 발휘한 능력, 또는 제공한 노동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능력과 노동의 질이 점차 평준화되는 경향이 생겼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현재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혁신들, 즉 기계에 의한 자동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불러온 생산현장의 합리화, 개인 컴퓨터 혁명으로 인한 관리부처의 체계화 등이 이런 경향을 만들어냈다. 위의 용어들이 풍기는 긍정적 뉘앙스와는 별도로, 현장의 취업자들은 생산직, 사무직, 서비스직 할 것 없이 모두 거대 조직의 체계 속에 하나의 부분만을 담당하고 이미 표준화되어있는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포스트포드주의가 내세우는 소규모 생산단위 및 전문 기술 종사자들, 또는 몇몇 벤처 신화의 스타들은 절대 다수의 위와 같은 취업자들 속에 예외일 뿐이다. 평준화된 능력이나 노동의 질은 기업가의 눈에는 쉽게 대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일반 취업자들의 위치는 불안정하다.

이런 불안정의 상황 속에, 생존권 확보는 취업자들의 최우선 관심사였다. 이를 위해 그들이 과거 오랫동안 이 역할을 담당했던 공동체를 다시 불러낸 것은 자연스러웠다. 현대 사회의 환경에서 새로이 건설된 공동체는 취업자들 사이의 소모임부터 대형 노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 그것은 약자들의 권리 확보, 그들 간에 부조와 구호라는 과거 공동체의 전통을 잇는다. 성공적이었던 경우, 그 공동체는 국가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입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는 국가가 그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현 정부가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노동관련 법안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해져 진정 경제가 살아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법안이 취업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공동체 기능의 축소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를 제어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득권’ 유지를 위함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권리는 기득권보다는 생존권에 더 가까워 보인다.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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