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가 종말을 고했음을 알린 이는 사회학자 다니엘 벨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였다. 벨은 ‘탈산업사회의 도래’를,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을 통해 산업사회가 정보사회로 변화했음을 선구적으로 계몽했다. 정보사회의 진전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인류사의 도도한 흐름이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컴퓨터·인터넷 기반의 정보혁명을 ‘제3차 산업혁명’이라 부르고, 세계경제포럼(WEF) 창설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은 사물인터넷(IoT)·사이버물리시스템(CPS)·인공지능(AI) 등이 주도하는 정보혁명을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했다.

정보사회의 도래에 대해선 상반된 평가가 맞서 왔다. 기술 변화를 주목하는 관점은 인류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세계와 빠르게 작별한다고 본 반면, 사회 구조를 중시하는 관점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근대사회의 특징이 여전히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절충적 시각에서 볼 때 나라·직업·세대에 따라 변화의 체감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실제의 사회는 기술결정론이 상상하는 사회와 구조결정론이 강조하는 사회의 중간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회변동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변동에 대한 통제 불가능성이 정보혁명의 그늘을 이룬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빅데이터는 적절한 사례다. 나날이 쌓이는 무한 정보인 빅데이터는 상황을 더욱 명확하게 예측하고 취향에 따른 맞춤형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사생활은 여지없이 침해되고,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이 조종하는 감시망은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문제는 기술혁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경이로운 신기술의 행진이 구조화된 사회 불평등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소비자로선 더 없는 편리를 누리겠지만 노동자로선 이제 로봇에 의한 퇴출이 현실화되는 게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적 풍경이다. 경제학자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가 ‘제2의 기계시대’에서 강조했듯 기술변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미숙련 일자리는 기계가 대체하고, 자본이 노동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며,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제4차 산업혁명 담론을 주도해온 슈밥도 관리되지 않는 기술혁신이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안타까운 것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감각을 우리 사회는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녹색성장’과 ‘창조경제’ 등 미래지향 담론이 존재했고, 미래를 대비하는 국가 수준의 위원회와 센터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민적 시선에선 녹색성장보다 4대강 사업과 같은 토건산업이 먼저 떠오르고, 창조경제는 여전히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다음 정부는 또 어떤 그럴싸한 미래 담론을 들고 나올까.

어떤 이들은 현재 당면한 문제들도 많은데 한가롭게 먼 미래를 말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나 역시 미래학이 강변하는 호들갑스런 전망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인자동차·자동번역기·가상개인비서 등에서 볼 수 있듯 제4차 산업혁명은 시간의 문제이지 결코 아득한 미래가 아니다. 어느 사회든 ‘얼리 어답터’와 ‘슬로우 어답터’는 공존하기 마련이고, 어느 한 시각만으로 세계를 온전히 독해하기는 어렵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탓인지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 줄 풍요보다는 그 그늘에 더 관심이 간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강화될 빈부격차와 증가할 일자리 부족, 그리고 가속화될 직업구조 변동에 우리 사회는 어떤 대안을 준비해야 할까. “테크놀로지는 윤리적으로 중립이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 선악이 부여된다”라고 말한 이는 공상과학(SF) 소설가 윌리엄 깁슨이다. 정보사회의 빛과 그늘을 선악의 이분법으로만 파악할 순 없다. 하지만 너무도 분명할 그늘을 직시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미래의 과제가 아니라 현재의 숙제다. 지난주에 진행된 2016년 다보스포럼을 지켜본 개인적 소회를 적어둔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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