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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관제’의 추억

입력
2016.01.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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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군복무 시절 관제 보급품은 인기가 없었다. 사제에 비해 워낙 제품의 질이 형편없었던 탓이다. 공짜로 지급되는 담배는 한 대만 피워도 어질어질했고, 광목 천처럼 뻣뻣한 팬티는 빨래비누로도 때가 지워지지 않았다. 먹고 돌아서기 무섭게 배가 꺼지는 부실한 짬밥은 병사들을 늘 허기지게 했다. 집에서 돈을 타내서라도 관제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휴가에서 복귀하는 졸병의 손에는 사제 담배가 빠지지 않았고, 사제 러닝셔츠와 팬티 착용이 고참의 특권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 관청에서 만들었다는 뜻의 ‘관제(官製)’가 앞에 붙는 말치고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관제 운동’‘관제 데모’ ‘관제 캠페인’ 등 주로 권력이 강제하는 반민주적 행태를 표현한 단어들이 대부분이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거의 100년 가까이 애용해온 ‘관제 엽서’가 여전이 남아있는데도 용어를 ‘우편 엽서’로 바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92년 명칭을 바꾸면서 정부가 “국민에게 불쾌감을 주기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 관제가 가장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 건 관제 데모였다. 독재정권 시절 중ㆍ고교생과 공무원들은 수시로 안보궐기대회 등에 동원됐다. 당시 여의도광장에 남학생은 교련복에 목총을 들고, 여학생은 구급낭을 메고 땡볕에서 몇 시간씩 서있어야 했다. 학교 수업보다 각종 결의대회와 캠페인에 더 자주 불려 다니다시피 했던 시절이었다. 유신 말기 기억나는 대표적 관제 행사가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음 운동’이라는 정체불명의 캠페인이다. 처음에는 고위관리와 관변단체 위주로 시작한 캠페인이 전국의 도 단위 학생조직으로 커지더니 얼마 후에는 대기업들까지 잇따라 동참했다.

▦ 박 대통령이 ‘경제관련 입법 촉구 1,000만 명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관료들과 대기업이 속속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 그때의 장면이 겹쳐진다. 박 대통령은 서명운동에서 과거 새마음 운동의 추억을 떠올렸을 법도 하다. 하지만 최고 권력이 나서는 순간 시민들의 자발적 캠페인은‘관제’의 성격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국회를 건너뛴 대통령의 직접 정치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실효성 측면에서도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다. ‘관제’라는 딱지에 여전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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