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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아크로칸토사우루스의 구애 행위

입력
2016.01.1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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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고 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중앙홀에는 길이 11m짜리 거대한 수각류 공룡이 서있다. 수각류(獸脚類)란 두 발로 서서 다니면서 날카로운 이빨로 육식을 했던 공룡을 말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홀에 들어선 아빠가 갑자기 아이 손을 놓더니 공룡을 향해 달려가면서 소리친다. “와! 여기 티라노사우루스가 있네” 그렇지 않아도 관람객이 많아서 정신이 없던 아이는 아빠가 자기 손을 놓아 버려 당황하면서도 뿌듯해 한다. “우리 아빠가 티라노사우루스도 알다니, 정말 대단하고 멋진 아빠야”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채 30초가 지나지 않아서 실망한다. 공룡 밑에는 티라노사우루스 대신 ‘아크로칸토사우루스’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낯선 이름에 아이보다 더 당황한 아빠는 ‘고객의 소리’에 항의엽서를 넣는다. “내가 전세계 출장을 다닐 때마다 꼭 그 곳의 자연사박물관에 가본다, 무수히 많은 자연사박물관에 가봤지만 아크로칸토사우루스는 본 적이 없다. 무슨 듣도 보도 못한 공룡을 들여다 놓았나”라는 게 요지다. 맞는 말이다. 전세계 자연사박물관 가운데 아크로칸토사우루스가 전시된 곳은 미국의 캐롤라이나과학박물관과 한국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뿐이다.

공룡은 중생대에 살았다. 중생대는 ‘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로 나뉜다.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라고 하면 대부분 쥐라기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백악기 공룡이 더 크고 멋있다. 영화 ‘쥐라기 공원’에 나오는 공룡들도 사실 대부분 백악기 시대의 공룡들이다.

백악기 초기에 살았던 아크로칸토사우루스는 ‘높은 가시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두개골 뒤쪽에서부터 꼬리까지 기다란 돌기가 나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아크로칸토사우루스는 정말 멋진 공룡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듣보잡’이었다. 듣보잡은 인터넷 은어로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란 뜻이다. 유명한 미학자인 진중권 선생이 이 말을 사람에게 썼다가 무려 300만원의 벌금을 물었던 것으로 보아 사람에게는 써서는 안 되는 말이 분명하다. 하지만 공룡에게 쓴다고 해서 소송을 걸 자연사박물관은 없으니 항의엽서를 쓰신 아빠는 안심하셔도 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미국 콜로라도대 국제공동연구팀이 콜로라도주에서 발견한 육식공룡의 구애행위 흔적 화석. 문화재청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미국 콜로라도대 국제공동연구팀이 콜로라도주에서 발견한 육식공룡의 구애행위 흔적 화석. 문화재청 제공

지난 7일 ‘네이처’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에는 육식공룡들이 암컷의 사랑을 얻기 위해 구애 행위를 했다는 흔적화석을 발견했다는 논문이 게재되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관련기사▶ ‘육식공룡 구애’ 화석, 세계 첫 발견). 이 연구에 참여한 천연기념물센터의 임종덕 박사에 따르면 마치 수컷 타조가 둥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암컷 앞에서 구덩이를 파는 것처럼 수컷 공룡이 지름이 2미터가 넘는 구덩이를 발로 파낸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해부학적으로 새는 수각류 공룡에 속한다. 좌우로 뚫린 구멍에 다리뼈가 박혀 있는 골반 구조가 대표적이다. 이번 발견은 공룡의 구애 방식이 새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새가 공룡이라는 사실을 생태학적으로 증명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런데 이번 발견에서 주목할 점은 구애행위 흔적을 남긴 공룡이 바로 아크로칸토사우루스라는 사실이다. 이로써 아크로칸토사우루스는 더 이상 듣보잡 공룡이 아니다. 아크로칸토사우루스는 이제 공룡에 관한 책이나 강연에서 반드시 거론되어야만 하는 공룡계의 셀러브리티가 되었으며, 공룡에 관심이 있다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공룡 시대만 해도 짝짓기를 위해 수컷이 해야 하는 일은 별 것 없었다. 뒷발로 땅만 잘 파면 됐다. 하지만 아크로칸토사우루스의 후예 가운데는 짝짓기를 위해 매우 복잡한 구애 행동을 해야 하는 수컷들도 등장했다. 데이비드 로텐버그가 지은 ‘자연의 예술가들’(궁리)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열대 우림에 사는 파란정자새 이야기가 나온다. 파란정자새는 구애를 위해 정자(亭子)를 짓는다. 정자는 나뭇가지로 만든 나란히 마주 보는 두 개의 벽과 그 사이에 있는 통로로 구성되는데 꼭 파란색으로 장식해야 한다. 파란정자새는 아마도 파란색이 자기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를 위해 바닷가까지 날아가서 파란색 조개껍데기나 피서객이 버린 파란색 플라스틱 스푼을 물어오기도 하고, 부리로 과일을 으깨서 얻은 파란 색소로 정자를 색칠하고, 파란색 깃털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새를 공격하기도 한다.

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컷은 암컷을 꼬시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수컷들이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재주를 부리지만 부질 없는 짓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수컷 가운데 죽기 전에 암컷 곁에 한번이라도 가 본 개체는 전체 수컷 가운데 4%에 불과하다. 나머지 96%의 수컷은 평생 짝짓기 한 번 못해보고 생을 마감한다.

여기에 비하면 인간 남성은 정말로 복 받은 존재다. 대부분 큰 어려움 없이 짝짓기를 하고 가정을 이룬다. 짝짓기 확률은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과거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짝짓기를 가장 활발하게 해야 할 20, 30대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 작년 가을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의 57%는 결혼을 포기했다. 무릇 생명의 지고지순한 목표인 짝짓기를 청년들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보면 ‘이게 나라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나는 어렵지 않게 짝짓기에 성공해 두 아이를 두었다. 과연 나는 요즘 청년들에 비해 어떤 비교우위가 있기에 이게 가능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요즘 청년들보다 더 나은 것은 한 세대 먼저 태어난 것밖에 없다.

아크로칸토사우루스처럼 단순히 구덩이를 파는 것만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정을 꾸리는 일은 포기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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