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고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왜 아내를 ‘파트너’로 부르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리뷰에도 거기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한 블로거는 “단어 자체에 의미를 두는 소신 같은 것은 없어서 이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 공감이 잘 안되고 아무리 읽어도 어색”하다고 했다. ‘파트너’란 말은 나도 어색하다. 책에서는 이 말을 부부 상호 간의 지위를 평등하게 해주는 말이라며 사용의 변을 썼지만 사실 이런 말 하나가 부부의 지위를 평등하게 할 리 없다.

얼마 전 ‘육아의 온도’를 쓴 윤기혁 작가를 만난 일이 있었다. 윤 작가가 보기에도 이상했나 보다. “평소에도 서로를 파트너로 부르나요.” 당연히 평소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라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책 한 권을 쓰면서 그의 이름을 수 십 번씩 적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쓰게 된 말이 파트너였다. 그렇기에 파트너란 말은 3인칭 그에 가까운 말이다. 주로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쓴다. 이렇게. “이 사람은 제 파트너에요”.

그를 ‘파트너’로 소개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2007년, 서경식 선생님이 성공회대 방문교수로 한국 체류 중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선생님을 찾아 뵈며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때마침 결혼을 하게 되어 함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서 선생님의 책에서 F로 쓰고 계신 배우자분과 마주 앉아 나는 그를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일본인인 F는 아내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보통 배우자라는 말 대신 쓰는데, 바깥 주인인 남자와 대비되어 집의 ‘안 쪽’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 드리니, 두 분은 서로를 ‘파트너’라 부른다고 하셨다. 파트너라는 말은 안과 밖 같은 역할상의 고정관념이 없고, 꼭 법적 부부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동성애자들이 상대를 파트너로 부른다고 하는데, 어쩌면 거기에는 서로의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 그만큼 적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때 이후로 그를 아내나 와이프라 소개하는 것이 어색해졌다.

블로거의 지적처럼 단어 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트너가 아이를 남겨 두고 혼자 떠나야 하는 미국 행을 주저하고 있을 때 유학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 또 내가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꺼이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었던 것 모두 내가 그를 아내나 집사람이 아닌 파트너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윤 작가는 내게 가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물었다. 파트너로 부를 만큼 평등한 관계냐는 것이다. 솔직히 대부분의 아빠들처럼 나 역시 음식을 하거나 집안 정리에 서툴러 육아를 제외하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라면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평등에는 ‘반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부여된 ‘파트너’라는 이 공허한 배역, 이 배역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역할 놀이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까 각자의 역할은 계속해서 바뀐다. ‘집사람’이나 ‘안사람’ ‘바깥 양반’이라는 배역이 주는 고정된 역할이 없다. 오늘 파트너에게 애인이 필요하면 우리는 애인놀이를 하고, 내가 어리광을 부리면 파트너는 엄마가 된다. 파트너가 내게 아이 돌보는 역할을 기대한다면 나는 아이 돌보미가 되고, 파트너가 돈을 벌길 원하면 파트너는 직장인이 된다.

우리 부부는 평등할까. 명절 때마다 느끼는 현실적 권력관계와 불평등을 ‘파트너’라는 말로 적당히 은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평등은 서로의 존재를 깊이를 가진 인간으로 여기지 못하게 하는 ‘고정된 역할’에 대한 저항으로 얻어진다. 아빠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윤 작가가 휴직하면서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그걸 왜 남자가 해?”였다. 나는 육아하면서 “저 아빠는 직업이 없나 보다”라는 말이 늘 마음에 남았다. “파트너”라는 말, 그래서 내게 이 말은 해방의 말이다.

권영민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저자ㆍ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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