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화평론가가 아니다. 하지만 문화가 사회의 한 영역이기 때문에 문화 현상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에는 관심이 적지 않다. 사회학에서 문화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생활양식이 하나라면, 가치 체계가 다른 하나다. 후자의 관점에서 문화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이유를 선사한다. 의미를 상실한 삶을 오래 견디기 어렵다는 것은 인간이란 종이 갖는 특징이다.

이런 의미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 개인적·집단적 과거에서 어떤 것을 망각하고 어떤 것을 기억할지는 현재의 의미 구성에서 중요한 출발점을 이룬다. 예를 들어, 어느새 쉰을 훌쩍 넘긴 ‘386세대’는 질풍과 노도의 1980년대를 보냈기에 당시 관심이 높았던 20세기 우리 현대사의 재해석이 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그 재해석의 하나로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었다. 이 소설들은 그때까지 잊힌 역사를 불러내고 새로운 해석을 추구했다.

386세대와 대비되는 이들이 1990년대에 등장한 ‘신세대’다. 지난 몇 년 동안 화제를 모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주요 시청자 층을 이루는 3·40대가 바로 이들이다. 1997년, 1994년, 그리고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응답하라’가 소환하고 기억해내는 시기는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직후의 10년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보수의 시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고도성장의 마지막 시대였다. 문화적으로는 더없이 활기가 넘쳤던 시대이자 국가와 시장의 구속에서 벗어난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대이기도 했다.

문화사회학적으로 이 시기는 젊은 세대의 정체성에서 욕망이 이성을 대체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대였다. 이들은 민주화 세대가 강조한 집합적 이성보다 자본주의가 선물한 개인의 욕망을 중시했다. 그리고 이 사슬 풀린 욕망은 1980년대식 권위주의와 구별되는 1990년대식 개인주의를 등장시켰다. 누구에게나 10, 20대에 형성된 정체성이 평생 지속하듯, 이 시대는 30, 40대에게 젊은 날 기억의 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기억은 마음을 애틋하게 하고, 그 애틋함은 그리움을 안겨준다. 돌아갈 수 없기에 그 시간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세대에 따라 ‘황금시대(golden age)’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이다. 우리 사회에서 60대 이상 다수는 집 안에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연이어 들어오던 산업화 시대를 가장 살만했던 시절로 추억하고, 30, 40대 다수는 민주화의 개막에서 외환위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30, 40대에게 열풍을 일으킨 문화사회학적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응답하라 1988’ 제6화를 보면 당시 동물원이 불렀던 ‘혜화동’이 나온다. 휴대폰이 아닌 투박한 집 전화로 친구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릴 때 이 노래가 배경을 이룬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 올 것만 같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은 순정했던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이자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던 친구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그리움에 담긴 사회학적 코드다. 현재가 황량하면 할수록 누구나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2016년 현재의 우리 사회가 길을 잃었다는 게 나만의 느낌일까. 미래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과거를 돌아보면 거기에 따듯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존재한다. 지나친 경쟁으로 상처 입지 않은 순수한 우정이, 각자도생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살가운 공동체가 쌍문동 골목 안에 살아 있다. 그래서 ‘혜화동’에서 나오듯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문득 그 기억의 공간을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과거 지향적인 이야기라고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잘 만들어진, 그리움이 넘치는 좋은 드라마다. 정작 안타까운 것은 이렇듯 과거에서 계속해 응답을 찾는 우리 사회 현재의 모습이다. 언제쯤 우리 사회는 지나간 과거가 아닌 다가올 미래에서 응답을 구할 수 있을까.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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