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때 노란 피아노책 가방을 들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희 집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동네 이웃들에게 크고 작은 빚이 있었어요. 피아노학원 원장님이 아버지의 지인이라 무료로 교습을 해줬지만 어머니는 학원 보내는 일로 이웃들 눈치가 보였던 것 같아요. 채무관계에 있던 구멍가게 아저씨의 눈길을 피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반대쪽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저도 아저씨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었는지 곧 피아노에 흥미를 잃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합니다.

어제 음악을 틀어놓은 채 로렌스의 시집을 넘기다 문득 이 기억이 떠올랐어요. 작은 등 뒤로 커다란 피아노 가방을 숨기며 지나가려고 전전긍긍했던 그 시절에 젖어 드느라, ‘겨울나그네’는 듣는 이 없이 혼자 피아노 소리를 따라 길을 떠나고 있어요.

시인ㆍ한국상담대학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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