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불가역적

입력
2016.01.05 14:18
0 0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정치적으로 금수저 출신이며 동시에 전범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을 지냈고,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를,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도 총리를 지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0년대 후반 만주국의 총무청 차장으로서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했다. 일본의 패전 직후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혐의자였지만 기소되지 않고 풀려났다. 기시 노부스케는 자민당을 만든 주역으로 초대 간사장을 지냈다.

아베의 할머니의 할아버지 오시마 요시마사는 일본 육군 장군으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했고 당시 고종이 머물던 경복궁을 점령하여 친일 내각을 구성하게끔 했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정한론의 주창자인 요시다 쇼인의 신봉자였으며, 아베 신조 역시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베는 일본의 소위 역사수정주의 흐름과 역사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그 인식의 골자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 식민지 지배 및 전쟁 범죄가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아베가 공언하고 있는 최우선 과제는 평화 헌법 9조를 바꾸는 것이다.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서 불가역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평화 헌법 체제를 뒤집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 연말 위안부 관련 한일 합의에 담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이라는 조건은 아베가 꼭 넣을 것을 지시했다는 보도가 있다. 박근혜정부는 그 문구 넣을 것을 주장한 쪽이 한국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정황상으로 일본의 요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표현 자체는 1965년 한일 협정에 나타난다. 제2조에는 “두 나라 및 두 나라 국민 사이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 행정부 및 사법부가 그 동안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해서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할 때 내세웠던 근거가 바로 이 조항이다.

이번에는 ‘불가역적’이란 표현이 추가되었다. 불가역적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되돌릴 수 없음, 돌이킬 수 없음, 뒤집을 수 없음 등을 뜻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영어 irreversible은 동사 reverse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ir과 가능을 뜻하는 접미사 ible가 붙어서 만들어졌다. 한자어 ‘불가역적’과 의미 요소 및 형태 구성이 똑같다.

‘불가역적으로’는 문법적으로 정도 부사에 해당하며, 특히 강조어라고 할 수 있다. 강조어란 다른 단어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효과를 갖는 부사어를 통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영어 very, quite, absolutely, definitely 등이 바로 강조어다. 한국어에서는 매우, 엄청나게, 끔찍이 등이 강조어이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졸라’ ‘열라’ 등을 즐겨 쓴다.

아베는 이번 합의 뒤에 “이제 모두 끝이다.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의아한 것은 아베가 제대로 사죄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이번 합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아베가 한국 정부에 대해 가졌던 불만은 한국 정부가 계속 ‘골문 위치’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요구해 온 것은 단지 공식적인 사과였을 뿐이다.

불가역적이란 말은 민주주의, 자유, 평화, 공존, 진보, 경제 번영 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업적이나 성취에 대해서 쓸 때 빛난다. 반면에, 그 말이 환경 파괴, 정치적 퇴행, 계층 구조 고착, 분배 구조 양극화 등과 같은 것에 쓰일 때는 거부감을 주게 된다.

합의문에서 ‘불가역’이란 말을 썼다고 해서 그 합의가 불가역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 구성원 전체 내지는 대다수에 의해 그 합의가 받아들여지고 지켜질 때에만 불가역적이 되는 것이다.

‘배신’ ‘진실’ 등의 초보적 어휘만을 쓰던 박 대통령이 이제 급기야 ‘대승’을 입에 담았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간에 탈 것은 얼마든지 뒤로 굴러간다. 이미 박 대통령 스스로도 많은 분야에서 정치적, 역사적 역주행을 해왔다. 대승적으로 되돌리고 뒤집어야 할 것은 박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들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