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수저론’이 확인한 절망의 벽
새해에는 절망이 분노로 바뀔 수도
당장 변화의 단초 필요한 위기상황

연말을 유난히 참혹한 이야기와 함께 보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고 착잡하던 차에 요즘 우연히 TV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에 빠졌다. 며칠 전 휴일 아침에는 돌연한 2부작 드라마 ‘너를 노린다’에 또 충격을 받았다. 앞서 영화 ‘베테랑’도 기사와 소개 프로그램을 통해 내용을 알만큼 아는 터다.

권력 금력에 언론까지 담합과 거래로 뒤엉킨 우리 사회 상층구조의 악취 나는 부패 카르텔 이야기들이다. 물론 지금 시점으로 보면야 여러 차례 실소할 만큼 비현실적이다. (유사한 캐릭터들은 있을 수 있겠으나, 유착의 구조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아마 1980년대 군사정권 때까지라면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것이다.

올해를 풍미한 유행어 중에서 ‘수저론’은 단연 압도적이다. ‘헬조선’이 과장된 비하와 작위로 불편한 데 비해, 수저론은 현실성을 인정 안 할 도리가 없다. 심각한 계층 고착화는 보수적인 국책연구기관에서도 명백한 통계수치로 입증해 보일 정도니까. 앞서의 영화, 드라마들에서도 흥행적 요소를 빼면 결국 골격은 금수저들의 언터처블 구조다. 수저론에 끄덕이는 관객들이 판타지 아닌, 현실로 공감하는 이유다.

수저론은 그러므로 ‘올해의 유행어’ 정도로 흘려 보낼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나마의 역동성조차 상실하고 숨 구멍 없는 경색된 정체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촌철의 상징이다. 말이 좋아 정체지, 머무름은 곧 퇴행이다. 청년세대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금수저를 물지 못한 청년과 금수저를 물리지 못한 부모 세대 모두를 삶의 결정론, 혹은 운명론에 빠뜨려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무서운 용어다.

그래서 수저론은 혁명을 배태하는 위험한 개념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불온한 반동의 기운은 싹을 틔우게 마련이므로. 세상 흐름에 밝은 언론계 원로선배가 “도무지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을 경우, 적어도 내년 하반기쯤에는 나라가 민란에 가까운 위기국면에 들어설 것”이라고 섬뜩하게 예언한 기억이 난다.

더욱이 경제사정이 더 나빠져 옹색한 격자방의 공간조차 줄어들 조짐이 보인다면, 방향 없는 분노는 우리 사회 전체를 삼키게 될 것이다. 수저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청년들에게는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파해야 하는 평생이 돼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장하성 고려대 교수 같은 이는 이미 “청년들이여, 분노하라”고 기치를 들었다.

우울한 세밑이지만 의례 그랬듯 올 한 해도 또 개탄과 푸념만으로 떠나 보내선 안 된다. 새로운 목표와 의지를 수반하지 않는 망년(忘年)은 아무리 근사한 새 달력을 매단들 결코 달라진 신년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새해부터 우리사회 궁극의 목표는 이 완강한 계층의 벽에 구멍을 내고 좁은 사다리라도 걸쳐놓는 것에 모아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기득권도 특별히 보호받아서는 안되며, 어떤 부당한 갑질도 더는 허투루 용납돼선 안 된다.

절망과 분노를 끼고선 어떤 명분 있는 정책도 지지를 받기 어렵고, 어떤 합리적 정치행위도 냉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국가사회가 촌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여서, 소수의 금수저 카르텔 사회에선 대기업도 물건 팔 소비시장을 확보할 수조차 없게 된다.

국가의 향도역할을 맡은 정부와 정치권이 ‘진실한 자, 배신자’나 가르고, 계파 유불리나 계산하는 그들만의 정치게임에나 정신 팔 때가 아니다. 모든 분야에 걸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격려와 배려, 계층이동을 위한 출구 뚫기, 기득권에 대한 엄정한 법적 통제와 감시 등이 새해 벽두부터 결코 미뤄선 안 될 시대적 과제다. 모름지기 공적인 권력은 이런데 쓰라고 국민이 쥐어준 것이다.

그저 꿈꾸는 건 희망이 아니다. 꿈 꿀만한 작은 단초라도 있어야 희망이다. 이걸 마련해 주는 게 정부와 정치권, 나아가 작은 기득권이라도 가진 기성세대 모두가 세밑에 다짐해야 할 일이다. 기왕 가진 좋은 수저로 계속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주필 junlee@hankookilbo.com

[H2015111700386-01] 이준희 주필./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2015-11-17(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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