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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떠난 ‘섬’에 기댄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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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떠난 ‘섬’에 기댄 시간들

입력
2015.12.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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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일이면 2015년의 마지막 하루이다.

첫 하루를 연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삼백 육십여 일이 넘는 그 많은 날들 모두 소임을 다한 채 흘러가고 없다. 올 한 해도 이렇게 세월의 더께를 채우며 기억 저편으로 저물어 간다. 누구나 이맘때가 되면 더 이상 ‘오늘’일 수 없는 지난 기억 하나쯤은 꺼내어 붙들게 된다. 과거를 들추는 부질없는 짓이 아니라 흘러간 날들 속에 끼워 보낸 아쉬움을 되살려 자신을 살피고 다독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 누군들 살아가는 내내 숱하게 맺어지고 흩어지는 삶의 편린들로 웃거나 울다 지샌 밤들이 없겠는가. 한 해를 이렇게 보내려니 나 역시 뭔가 하나를 붙들고 아쉬움을 달래고픈 마음이 자꾸 커진다.

내게 가장 큰 아쉬움은 갑작스럽게 맞이한 ‘섬’의 부재이다. ‘섬’은 서울 명동 인근의 오래된 건물에 세 들어 있던 작은 선술집의 이름이다. 몸을 기댄 지 오래 되었으나 여전히 낯설어 항상 떠날 궁리만 하는 이곳 서울에서 ‘섬’은 내 찌든 가슴을 씻는 곳이었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섬’은 아주 특별했다.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이 모여 위안을 주고받는 쉼터이자 일종의 작은 해방구와 다름이 없었다. 지친 몸을 끌고 찾아온 이들에게, 섬지기로 불리는 주인장은 솜씨 좋은 기타와 하모니카를 곁들인 노래로 가슴을 적시고 채워주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돋궈지면 누구든 기타를 들어도 되었고 누구든 노래를 부르면 박수로 환영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 자체로 매일 작은 축제가 열리는 그곳에서는 찾는 이들 누구나 ‘섬에 왔으니’ 금방 친구가 되었고, 어느새 처음 보는 옆 테이블 사람들과도 잔을 부딪치거나 어깨동무를 할 만큼 끈끈한 공감의 기운에 빠져들기 마련이었다. 홀로 가든 여럿이 가든 누구나 ‘고립’되지 않았고 모두가 자기 일처럼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끼리 긴 밤을 지새우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일도 꽤 많았다. 이른 아침 도심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귀가 또는 출근을 한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섬’에서는 일상이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또는 외롭거나 지칠 때, 더불어 편안한 술자리가 그리울 때 마다 ‘섬’은 늘 빈자리를 채워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술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공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섬’이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이 빌딩을 짓겠다는 건물 주인의 뜻에 의해 반강제로 문을 닫게 됐다. 늘 그 자리에 있을 줄만 알았기에 아쉬움이 더욱 크다. 언제나 찾아 갈 기운이 돋을 때면 그저 걸음만 옮기면 되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다. 이달 초 문을 닫기 전 몇 주일에 걸쳐 열린 ‘Family Day’에는 수없이 많은 ‘섬 폐인’들이 몰려들어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끝이 있으니 다시 시작이 있지 않을까?”

“섬은 위안이었어. 살면서 못 잊을 거야. 고맙다!”

공식적인 ‘영업’ 마지막 날에는 모두가 ‘섬’에서 받은 위로의 시간들을 기억했고 오랜 이별이 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13년 동안 ‘섬’을 지켜 온 섬지기 박정석(47)씨는 사람들과 잘 이별하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일이라며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기에 분주했다. 수없이 많은 손님들을 치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다른 이들을 더 생각하게 되더라는 그는, 나이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손님들은 모두 스승이었다는 말로 ‘섬’으로 맺어진 인연의 끈을 고마워했다. 짙은 아쉬움은 그날 밤 모두에게 함께 퍼지고 있었다.

며칠 전 슬며시 ‘섬’을 다시 찾아갔다. 더 이상 불은 켜지지 않고 특유의 상징인 노란 간판까지 떼어진 채 굳게 닫힌 철문이 내려앉아 있었다. 철문에는 아쉬움 가득한 글귀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여기는 섬입니다. 긴 시간 동안 같이 울고 웃었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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