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 대선의 최대 이변 ‘트럼프 현상’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이래 공화당의 오랜 잘못된 ‘업보’라고 비판한 폴 크루그먼 교수.

폴 크루그먼.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미국 프린슨턴대 경제학과 교수였으며, 지금은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다. 전통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한 선진국간 무역 원리를 ‘신국제교역이론’으로 풀어냈지만, 다른 방면에서도 미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1999년 이후 뉴욕타임스에 집필 중인 칼럼 때문이다. 진보적 시각에서 특유의 통찰력으로 현안을 분석ㆍ비판하기 때문에 미 공화당과 보수진영은 눈엣가시로 여긴다. 칼럼이 얼마나 신랄한지 그에게 공격 당한 사람은 다음 번 선거에서 반드시 공화당에 투표할 정도라는 풍자만화가 나올 정도다.

크루그먼 교수가 21일자 ‘도널드와 승리 결정자’라는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게재했다. 트럼프 현상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고 분석했다. 좌충우돌과 인신공격ㆍ인종차별적 막말이 공화당 지지계층에서 지지를 받는 건 공화당의 과거 ‘업보’(Legacy)라고 단정했다. 또 업보의 근원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에서 찾았다. 2000년 선거에서 부시 캠프와 공화당은 상대 후보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을 ‘따분하고 거만한’사람으로 몰아 붙였다. 고어에게 맞설 실력이 없었던지, 고어가 구체적 수치로 정책 토론을 펼치려고 하면 ‘쩨쩨하게 숫자나 따진다’고 회피했다. 대신 ‘부시는 저녁 자리에서 맥주 한잔 걸치며 서민과 얘기하는 사람’이라는 감성적 선거운동을 펼쳤다.

부시의 당선은 복잡한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정책의 내실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분위기를 중시하는 풍토를 정착시켰다. 이런 게 주류적 경향으로 굳어지면서 공화당은 반대파와 언론의 건전한 비판마저 무시하기 시작했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고 앞뒤 맞지 않는 거짓말 정책을 쏟아냈다. 거짓이 드러나도 인정하기는커녕 두루뭉술 넘기기를 반복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이런 나쁜 전통이 앞뒤 안 가리고 민주당을 비판하는 사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 등으로 이어져 내려와 괴물 트럼프를 만들어냈다고 꼬집었다.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 현상에 당혹해 하지만, 제때 반성 않고 고치지 못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국 진보진영의 브레인답게 공화당을 ▦모든 사안을 단순화하고 비판하면서도 대안은 없는 집단 ▦한때 효과를 봤으나 더 이상 통하기 어려운 꼼수를 고집하는 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크루그먼 교수의 ‘분석 틀’을 한국에 대입해보니, 2008년 광화문 거리를 휩쓴 ‘광우병 쇠고기’ 시위 이후 진보진영과 야권의 모습이 겹쳐진다. 2015년의 분열, 혼돈, 지리멸렬이 갑자기 시작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8년도 더 된 건 아닐까.

젊은 계층의 보수화, 숙련 노동력의 고령화, 생산현장의 자동화ㆍ생력화(省力化) 등 2010년 이후 시대는 크게 변했다. 그러나 야권의 상황인식은 1980년대 학생 운동권, 1990년대 시민단체 시절의 어쭙잖은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있다. 현재의 낮은 지지율은 정책 대안은 없고 모든 의사 결정 논리를 ‘반정부’로 단순화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미국 공화당처럼 누가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원래 우리에게 부정적인 세력’이라고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 광화문 시위 이후 공권력을 피해 조계사에 피해 들어간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여론 뭇매를 맞았지만, 따지고 보면 박원석 정의당 의원 등 과거 선배들의 모범 답안을 따랐을 뿐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국 보수 진영 논리를 대변하는 월스트리트저널(22일자)에는 ‘차라리 힐러리를 뽑아서 우리 잘못을 속죄하자’는 칼럼(물론 본심은 아닐 것이다)까지 실렸다. 이합집산에 들어간 야권과 노동계가 과거 영광을 되찾는 길도 월스트리트저널의 주문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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