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다시 읽고 싶은 그림책] 12. 작은 기적

‘작은 기적’ 피터 콜링턴

또다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부모님이 가톨릭 신자이기에 어릴 적 크리스마스는 의심할 여지없는 최고의 명절이었다. 12월 한 달 내내 성당 크리스마스 행사를 위해 노래와 연극을 연습하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엔 조촐하게 파티도 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겐 크리스마스가 그냥 공휴일 중 하루라는 사실은 머리가 조금 굵어진 후에야 알게 됐다. 다른 종교에도 ‘성스러운 탄생’이 많은데 (부처님의 생일은 ‘석가탄신일’이라고 부른다) ‘성탄절’이라는 보편적인 이름은 기독교가 독점한다. 기독교가 지구촌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서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에도 신나는 캐럴에도 둔감해진다. 동심을 잃은 탓이기도 하지만 점점 요란해지는 크리스마스에 씁쓸한 기분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크리스마스를 선물과 쇼핑의 명절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종교의 기념일이라기보다 흥청거리는 연말의 신호탄처럼 돼버렸다. 쇼핑의 명절이 된 크리스마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약자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님의 생일에 약자들이 소외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거리의 악사인 할머니가 눈길에 주저앉아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을 찾고 싶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꺼내보는 그림책이 있다. 피터 콜링턴의 ‘작은 기적’이다. 신기하게도 글씨가 하나도 없다. 글씨 없이 그림의 힘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림만으로 배경, 인물, 주제 등 이야기의 요소를 다 보여준다. 사실적이면서 요란하지 않게 드라마틱한 그림이 매력적이다.

좁고 낡은 방 안에서 한 할머니가 춥고 처량한 아침을 맞는다. 먹을 것과 돈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할머니는 아코디언을 메고 나간다. 밖은 눈밭이고 할머니의 집은 지붕 달린 마차다. 지금은 눈밭에 처량하게 서 있지만 할머니가 젊었을 적엔 이 마차로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아코디언 공연을 했을 것 같다. 할머니는 식당과 상점이 있는 거리에서 발치에 나무상자를 두고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저녁이 될 때까지 나무상자에는 동전 하나 담기지 않는다. 할머니는 골동품 가게에서 아코디언을 판다. 나무상자에 돈을 담고 눈물을 흘리며 아코디언에 입을 맞춘다.

오토바이 소매치기는 할머니의 분신 같은 아코디언을 판 돈을 빼앗아 간다.

거리의 오토바이 소매치기가 할머니의 나무상자를 강탈한다. 할머니는 소매치기를 쫓아간다. 눈길에 난 오토바이 바퀴 자국은 성당으로 이어진다. 모금함을 훔쳐서 성당에서 나오는 소매치기와 실랑이 끝에 할머니는 모금함을 겨우 낚아챈다. 할머니는 성당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크리스마스 구유 장식과 마리아, 요셉, 아기예수, 동방박사, 목동 목각인형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모든 것을 정리한 할머니는 모금함을 구유 장식 옆에 고이 두고 성당을 나온다. 눈길을 가던 할머니는 쓰러지고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오토바이 소매치기에게 모금함을 지켜낸 할머니. 문을 잠그고 돌아보니 성당 안은 아수라장이다.

멀리서 한 무리가 할머니를 향해 다가온다. 가까이 온 그들은 사람이 아닌 목각인형들이다. 할머니의 무릎 높이보다도 키가 작은 목각인형들은 할머니를 영차영차 떠메고 마차로 간다. 할머니를 방 안에 눕힌 목각인형들은 아기예수를 안은 마리아만 남고 세 무리로 흩어진다. 동방박사 목각인형들은 골동품 가게로 간다. 그들은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골동품 주인에게 내밀고 할머니의 아코디언을 산다. 동방박사들은 마트에 가서 식료품도 산다. 요셉 목각인형은 목수답게 작은 전나무를 베어오고, 목동 목각인형은 소매치기에게 강탈당한 할머니의 나무상자를 가지고 온다. 목각인형들은 분주히 요리하고 마루를 수리하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한다. 마리아는 기절한 할머니의 손을 내내 잡고 있다.

할머니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동안 목각인형들은 할머니의 집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정신이 든 할머니는 달라진 집 안을 보고 깜짝 놀란다. 되돌아온 아코디언과 따뜻한 식사와 소박한 크리스마스트리. 나무상자에는 약간의 돈도 들어있다. 목각인형들은 사라지고 없다. 영문을 모르는 할머니는 창문을 열고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 창문을 닫은 할머니는 맛있게 음식을 먹고 흥겹게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왜 이 책의 제목이 ‘작은 기적’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길이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목각인형들이 벌이는 소소한 기적이기 때문에 ‘작은’이고 (목각인형들은 할머니에게 ‘큰 기적’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한 끼 분량의 음식과 약간의 돈이 바닥나면 할머니는 다시 처음의 곤궁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할머니가 눈밭에서 쓰러졌을 때 목각인형들이 구해준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이라면 할머니는 그대로 얼어 죽었을 것이다. 목각인형들이 할머니에게 가져다 준 행운들은 얼어 죽기 전에 할머니가 본 환상에 가깝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얼어 죽기 전에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난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 돌아가신 할머니의 환상을 본 것처럼.

쓰러진 할머니에게 달려오는 목각인형들. 할머니가 바닥에 뒹굴던 목각인형들을 일으켜 세워줬던 것처럼, 이번엔 목각인형들이 할머니를 돌본다.

작가 피터 콜링턴이 이런 비현실적인 일을 공들인 그림으로 보여준 이유는 무엇일까? 할머니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코디언을 판 돈, 그 소중한 돈을 오토바이 소매치기에게 강탈당한다. 소매치기가 훔친 성당의 모금함을 낚아챘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돈 상자는 되찾지 못했다. 할머니는 모금함 속의 돈을 가져가고 싶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을까?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성당에서 사라졌을 돈이고, 할머니는 가진 돈 전부를 오토바이 소매치기에게 강탈당한 상태다. 그러나 할머니는 바닥에 뒹구는 목각인형들을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고 모금함은 그 옆에 두고 성당을 떠난다. 돈을 가져가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모르지만 할머니는 그 돈에 손대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불행을 벌충하려 들지 않고 오롯이 감당하려 한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의 동전 두 닢’처럼 할머니는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닐지라도 자신의 전부를 신에게 바친 셈이다. 그 가난한 마음이 작은 기적을 불렀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그 마음 자체가 기적이다) 피터 콜링턴은 기적 같은 가난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모든 비현실적인 기적들을 우리 눈앞에 펼쳐준 듯하다.

골동품 가게에 간 동방박사들. 이어서 마트에서도 동방박사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글씨 없는 그림책은 무성영화 같다. 대사 없는 영화가 배우의 움직임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처럼, 글씨 없는 그림책은 그림에 빠져들게 해 독자의 상상력을 더 자극한다.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할머니의 탄식, 슬픔, 놀라움, 체념, 기쁨, 감사하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하다. 딸아이는 연신 “할머니 어떡해”라고 안타까워하고 “동방박사들 대단하다”며 놀라워했다. 글씨가 있는 그림책을 읽을 때보다 등장인물들에게 더 깊이 감정이입을 했다.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내미는 동방박사들의 무심한 뒷모습과 골동품 가게 주인의 난감한 표정을 보고 낄낄대고, 장을 보고 요리까지 척척 해내는 동방박사들을 보고 “동방박사들도 자기 나라에선 임금님이라던데 저렇게 다정한 임금님 밑에 사는 백성들은 좋겠다”라고 중얼거린다. 할머니의 나무상자를 찾아온 목동 목각인형을 보고는 “우와 재주도 좋다. 소매치기한테 어떻게 빼앗아 왔지? 몰래 가져왔나”라고 재잘거리고, 전나무를 베어오고 마루를 척척 수리하는 요셉 목각인형이 멋지다고 한다. 그림의 귀퉁이 한 조각도 놓치지 않고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무성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듯하다.

그림책은 본질적인 것을 직관으로 접근하게 해 준다. 글씨 없는 그림책은 그림책의 그러한 면을 극대화시킨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은 기적’은 침묵의 무게와 울림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내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그림책이자 최고의 글씨 없는 그림책이다.

김소연기자 au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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