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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혁신의 확산’ 에버렛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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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혁신의 확산’ 에버렛 로저스

입력
2015.12.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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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얼리 어답터란 ‘신상(품)’이 나오자마자 보통 사람보다도 아주 일찍부터 사서 쓰는 사람을 가리킨다. 때로 얼리 어답터들은 ‘신상’의 출시를 오래 전부터 무척 기다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출시 전에 외국에서 ‘직(접)구(매)’ 하기도 한다.

얼리 어답터란 말을 아카데믹한 차원에서 처음 쓴 이는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매스컴 이론가인 에버렛 로저스(Everett Rogersㆍ1931~2004)이다. 그는 ‘혁신의 확산’(1962)에서 혁신을 채택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시간 순서에 따라 혁신가(innovator), 얼리 어답터, 초기 다수, 후기 다수, 굼벵이(laggard)로 분류했다.

로저스의 이러한 이론적 가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미국 아이오와의 지역 사회에서 잡종 종자용 옥수수를 채택한 농부들의 연도별 수와 그것의 누계에 관한 경험적 통계를 일반화한 것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채택자의 누적 숫자는 초기에는 아주 느리게 증가하다가 어떤 시점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정점에 도달해서는 평탄하게 된다. 이것을 그래프로 그리면 흔히 학습 곡선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S자 모양에 가깝게 된다. 한편 각 연도별로 새롭게 채택한 사람들의 수 각각은 전체로 모아 보면 거의 종 모양에 가깝다.

‘혁신의 확산’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로저스는 각 연도별로 혁신을 채택한 사람들의 수 각각이 그리는 전체 종 모양을 통계학에서 말하는 정규분포에 수렴시켰다. 정규분포란 사람의 키, 몸무게, 지능 등에서 그러하듯이 분포의 중간에 평균값이 있고 이 평균값에 다수가 몰려 있으며, 평균값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 대칭 형태로 평균값에서 멀어질수록 점차 빈도수가 작아지는 특징을 갖는다. 말 그대로 종 모양의 분포다.

표준편차란 어떤 측정값이 평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나타내기 위한 기준 단위인데, 로저스는 정규분포의 그래프에서 평균의 왼쪽 방향으로 평균으로부터 1 표준편차까지의 영역을 ‘초기 다수’에, 1 표준편차로부터 2 표준편차까지 사이의 영역을 ‘얼리 어답터’에, 2 표준편차의 왼쪽 바깥 영역 나머지를 ‘혁신가’에 할당했고, 반면에 평균으로부터 오른쪽으로 1 표준편차까지의 영역을 ‘후기 다수’에, 1 표준편차의 오른쪽 바깥 영역 나머지 모두를 ‘굼벵이’에 할당했다.

로저스는 전체 비율에서 혁신가에 2.5%, 얼리 어답터에 13.5%, 초기 다수에 34%, 후기 다수에 34%, 굼벵이에 16%를 배정했다. 사실, 이 값들은 정규분포에서 표준편차의 값에 따라 자동적, 일률적으로 정해지는 비율인데 이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로저스는 대중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끔 대략의 근사값을 만들었을 따름이다.

로저스의 책 ‘혁신의 확산’에서 다루는 혁신에 해당하는 것은 특정한 기술이나 그 기술의 성과인 기계 등만이 아니다. 여러 개혁적 조치도 혁신에 해당한다. 그래서 아마도 로저스 책의 역자들이 번역본 제목을 ‘개혁의 전파’라고 붙인 듯하다. 또한, 특정한 새로운 사상이라든가 학문, 뉴스, 법안 혹은 ‘안전한 섹스 캠페인’ 등도 혁신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로저스는 확산되는 새로운 모든 것을 다루며 무엇보다도 확산이라는 것을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혁신가-얼리어답터 사이 단절이 문제

상식적으로 말해서 로저스 모델의 문제점은 거의 모든 혁신의 전파가 일괄적으로 정규분포에 수렴한다고 보는 점에 있다. 로저스는 겉으로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고수한다. 또한 혁신 수용의 유형을 기계적으로 다섯으로 나누고 각 유형의 비율을 정규분포의 표준편차에 도식적으로 상응시킨 것도 문제다. 각각 혁신의 내용이나 특성에 따라서 유형의 종류 및 각 유형별 비율도 달라질 게 틀림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미 전파나 수용이 하나의 사건으로서는 이미 완료되어 버린 상태에서 사후적으로만 혁신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상당수의 혁신은 도입 초기에 실패해버리며, 설령 도입이나 전파의 초기 단계에 어렵사리 진입하더라도 그 채택 속도나 채택자 유형별 비율은 결코 균질적이지 않으며 선험적으로 결정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게 상식적으로 더 타당하다.

또, 내가 보기에 오늘날 일상적으로 우리가 얼리 어답터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로저스의 가설에서는 혁신가라고 불리는 유형에 해당한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로저스의 가설 자체와 그 유형들을 가지고 말할 때 현실에서 우리가 자주 부딪히는 문제는 혁신가와 얼리 어답터 사이, 얼리 어답터와 초기 다수 사이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심각한 단절 내지는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내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과 연관해서 로저스도 소위 ‘결정적 다수(critical massㆍ임계 질량)’라는 테마를 다루기는 하지만 매우 부실하다. 그래서, 마케팅 컨설턴트인 제프리 무어는 이러한 단절을 지질학 용어인 ‘캐즘(chasmㆍ아주 깊은 틈)’이라고 부른 뒤에, 캐즘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마케팅의 주요한 화두로 제시했던 것이다. 한편, 마케팅학 교수였던 프랭크 베이스는 혁신의 수용자층을 그저 혁신가와 모방가로 크게 대별한 뒤, 현재의 채택 수준이 미래의 잠재적 채택 수준을 어떻게 결정할까 라는 문제에 관해서 입소문과 같은 내부 효과 및 매스컴과 같은 외부 효과로 나누어 수학적으로 고찰했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저항’은 필수

그런데, 예컨대 정치 개혁이나 행정 개혁 또는 교육 개혁과 같은 문제를 소위 신상품이나 신기술의 도입 및 전파 등의 문제를 다룰 때와 동일한 이론적 모델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로저스의 용어로 설명하면 전자의 개혁들은 그 ‘혁신의 특성’들이 상업적 내지는 기술적인 후자와 비교해서 아주 독특하다. 심지어는 단지 양적인 차이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를 갖는 듯하다. 로저스는 혁신의 과정을 ‘지식-설득-결정-실행-확인’의 단계로 나누었는데, 정치, 행정, 교육 분야 등의 개혁은 무엇보다 설득이 문제다. 이해 관계나 입장이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설득이란 미리 결과를 정해 놓고 일방적으로 홍보하거나 혹은 설득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해서 ‘직권 상정’이나 ‘긴급 명령’과 같은 독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때의 설득은 민주적인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 토론하고 숙고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한에서 얼마든지 실패할 수도 있는 그런 설득이다.

개혁을 수행하려는 사람의 눈에 ‘저항’으로 보이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바로 이 저항의 존재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적 정치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저항을 행정적, 치안적, 기술적, 공학적으로 처리해버리고 마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3일 선거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여야 대표와 국회의장.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지난 3일 선거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여야 대표와 국회의장.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판을 갈아엎는 혁신이 불가피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40년대에 경제적인 혁신을 ‘창조적 파괴’라고 부른 사람은 경제학자인 슘페터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이자 경영 컨설턴트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은 혁신을 두 가지로 나누어 ‘지속적인 혁신’과 그에 대립되는 ‘판을 갈아엎는(disruptive) 혁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전자는 기존 주류 시장에서 성능을 향상시키는 기술에 의해서 성립하는 혁신이며, 후자는 업계를 완전히 재편성하고 시장 대부분을 점유할 신제품이나 서비스 혁신을 가리킨다.

한국 사회에서도 개혁 내지는 혁신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박근혜정부는 실제로는 ‘노동 개악’에 불과한 것을 말로만 ‘개혁’이라고 부르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으며, 야권에서는 서로 소위 혁신을 부르짖던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끝내 갈라섰다. 위로부터의 반동적 개악에 불과한 것이 개혁 ‘코스프레’로 나타나고 있고, ‘사소한 차이’만을 보이는 중도 정치인들 사이의 지분 싸움에서 혁신 ‘드립질’이 남발되고 있다.

정작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들 모두 큰 문제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적어도 판을 갈아엎는 혁신이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혹은 그런데, 우리에게는 정치적 구세주가 필요한 건가, 아니면 우리 각자가 낡은 정치판 자체에 대한 혁신의 지하드에서 얼리 어답터가 되어야 하는 건가.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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