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집 뒷산과 눈앞에 멀리 펼쳐진 첩첩 능선마다 가을 잎들이 거의 떨어졌다. 초록에서 붉음까지 계절의 수채화를 그리던 산은 붓을 바꿔 들고 먹을 갈고 있다. 검고 묵직한 수묵화의 계절이 온 것이다. 고슴도치처럼 제 몸을 드러낸 겨울산은 우뚝우뚝 솟은 바위의 절벽과 물이 말라버린 계곡의 굴곡을 거인의 비밀처럼 보여준다.

숲이라는 이름으로 개체성을 잃어버렸던 나무들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들은 하늘 향해 뻗은 가지의 방향으로 자신의 생존 이력을 설명하고 있다. 마당 끝에 큰 그늘을 드리워 여름날 그 아래서 쉬었던 층층나무 가지를 올려다본다. 한 밑동에서 두 개의 가지를 키워 올린 나무는 서로의 몸을 휘어가며 겹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를 뻗었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인지 생존 전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층층이 뻗어 올린 그 수많은 가지들이 어찌 그리 조화롭게 펼쳐있는지 놀랍다. 빼곡한 곳에선 가지를 휘어가고 드문 곳에선 새로운 나무를 키우며 서로의 숨통을 열어주는 삶의 방식이 지금 이렇게 무성한 산을 이루었다.

며칠 전부터 고요한 겨울 숲에서 기계톱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먼 앞산에서 들리기 시작해서 점점 소리를 키우며 우리 집 뒷산까지 다가왔다. 사유지가 아닌 군 소유의 산에 간벌을 하는 것이다. 간벌은 숲을 헐렁하게 하여 나무를 굵게 키우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삶에 유용함을 생각하여 숲을 가꾸는 조림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진 나무베기가 아니라 그냥 참나무 옆에 난 참나무를, 가시나무 옆에 있는 가시나무를 베고 오리나무 옆에 있는 오리나무를 베어 그것들을 굵게 만드는 것이 무엇에 유용한 것인지를 나는 모르겠다. 인간이 관여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존하고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일진대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톱날에 순식간에 쿵쿵 쓰러지는 나무들이 아까운 생각만 드니 나는 아무래도 실용주의자가 아닌가 보다.

내겐 어린 시절 민둥산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나무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헐렁한 아버지 지게를 지고 뒷동산 너머 민둥산으로 갔다. 총싸움을 하고 미끄럼을 타고 진흙으로 만든 아이들처럼 뛰놀다 지치면 골짜기에 드문드문 자라난 어린 소나무의 가지를 치거나 억새풀을 베었다. 억지로 한 단을 만들면 지겟다리를 질질 끌며 돌아왔다. 그때는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무의 밑동을 덥석 자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모든 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짓고 쇠죽을 끓여 굴뚝에 연기를 피워 올렸지만 나무는 아껴두었다 맨 마지막에 땠다. 깻단 콩대 왕겨 그리고 여물을 썰고 남은 볏짚을 다 때고 나서야 마당에 쌓아둔 나뭇단을 헐어 불을 땠다. 나무가 그만큼 귀하던 시절이었다.

산 밑으로 들어와 집을 수리하는데 나무를 때는 화목 보일러를 설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관에서는 화목 보일러 비용을 보조도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목 보일러는 마른 삭정이나 죽은 나무를 때는 것이 아니라 거의 통나무 수준의 장작을 태워야 하는 것이다. 한두 해도 아니고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기간을 뒷산 통나무로 난방을 할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는 통나무를 자르는 수고로움에 대한 두려움도 없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민둥산에 대한 기억이 막연한 황량함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내와 나는 연탄 보일러로 난방을 결정했다.

그나저나 집 뒷산에 베어 넘어진 나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산꼭대기 흙집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땐다. 어떨 때 산책길에서 죽은 나무토막을 질질 끌며 가는 뒷모습을 보기도 했다. 나는 소년 나뭇꾼이 되기로 했다. 아랫집 반장님께서 사륜구동 1 톤 트럭을 가져오셨다. 마당에 토막 친 나무를 한 차 내려놓으니 장승처럼 이가 빠진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신다. 황급히 배추 전을 부쳐 소주를 내오신다. 서먹하던 이웃에게 다정하게 술을 따라주시며 어여 마시란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던가 무용유용이라고…. 생각해보면 관에서 나무를 간벌하는 것도, 내가 연탄 보일러를 놓고 이웃이 화목 보일러를 사용하는 것도 나라는 존재를 사고의 중심에서 벗어놓으면 세상은 그저 무용유용으로 조화를 이루며 흘러가는 것이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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