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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우리도 박쥐처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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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우리도 박쥐처럼 살자

입력
2015.12.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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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새와 짐승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새의 대표선수는 독수리와 매, 짐승의 대표선수는 사자와 호랑이. 워낙 강한 상대들이라 승부가 쉽게 나지 않았다. 숲에 사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누가 이기든 삶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나 짐승이나 자신들을 잡아먹을 궁리만 하는 놈들이었다.

팽팽하던 전세가 짐승에게 기울었다. 새들은 급박해졌다. 하나라도 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때 만만한 대상이 눈에 띄었다. 바로 박쥐. 평소에는 먹잇감에 불과했지만 이젠 용병으로 끌어들일 논리를 세웠다. “너는 하늘을 난다. 그러니까 너는 새야. 우리 편에 서서 싸워!” 박쥐는 새를 위해서 짐승과 맞서 죽어라 싸워야 했다. 뒤로 물러서는 순간 새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박쥐는 밤에도 날아다닐 수 있어서 전투에 쓸모가 많았다. 박쥐는 두려웠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새가 되고 싶었다. 이왕 하는 것 열심히 하자고 맘 먹은 박쥐는 애사심 아니 애새심을 고양시키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박쥐 덕분에 새들은 우세를 확실히 점하게 되었다. 그러자 새들에게 박쥐는 눈엣가시였다. 아무리 날아봤자 젖먹이 짐승이라는 것이었다. 하늘을 나는 약간의 공통점이 있지만 젖먹이 짐승이라는 차이가 더 커서 새 집단 결속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새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눈치 챈 박쥐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도망쳤다.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박쥐에게 짐승들이 나타났다. “네, 이놈. 네가 새의 편에 서서 싸웠던 박쥐구나. 너는 우리와 같은 젖먹이 짐승이 아니더냐! 이런 천벌을 받을 놈. 하지만 우리가 넓은 아량으로 다 용서할 테니 지금부터는 우리를 위해 죽어라고 싸워 살려주는 은혜를 갚도록 해라. 우리가 승리하면 네게도 섭섭하지 않게 해주마.” 박쥐는 어쨌든 자기가 젖먹이동물인 것은 사실이니 짐승 편에 서서 열심히 싸워 승리를 쟁취하면 여생은 잡아 먹힐 걱정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로 죽어라 싸웠다. 스스로 애국심 아니 애짐승심을 고양시키며 원래 짐승들보다 더 열심히 싸웠다.

그런데 아뿔싸! 전선에서는 그렇게 죽어라 하고 싸우던 새와 짐승이 뒤에서는 몰래 종전협상을 하고 있었고 이윽고 협상이 타결되었다. 새와 짐승은 숲의 지배권을 반씩 나눠가지고 평화롭게 살기로 했다. 다른 동물들은 공포에 빠졌다. “새와 짐승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고 먹이사냥에 전념할 테니 이를 어찌할꼬!” 박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쟁이 끝났다. 나는 짐승의 일원으로 안전하게 살아가겠구나. 내 노고가 헛되지 않았어!”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짐승들은 평화를 박쥐에게까지 나눠줄 생각이 없었다. 짐승들은 언제든지 새로 돌변할 놈이라는 구실로 박쥐를 무리에서 내쫓았다. 새들은 박쥐가 짐승 무리에게서 쫓겨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쥐는 새와 짐승 모두에게 잡아 먹힐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뒤로 박쥐는 굴속에 들어가 쓸쓸하게 살게 되었다.

오렌지과즙을 나눠먹는 박쥐 무리.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오렌지과즙을 나눠먹는 박쥐 무리.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여기까지는 어릴 때 읽은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박쥐 이야기다. 이솝우화에서는 박쥐가 좀 약은 놈으로 나오기는 했다. 디테일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 보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이솝우화에서는 박쥐가 실패한 동물로 묘사되지만 박쥐야말로 가장 성공한 젖먹이동물이다. 지금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짐승과 새의 전쟁에서 짐승 측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사자와 호랑이는 단 한 개의 종만 살고 있다. 특징이 조금 다른 아종이 각각 8종과 9종이 있을 뿐이다. 독수리는 멸종위기야생동물 2급으로 인간의 보호를 받고 있는 형편이고 매도 17~19개의 아종이 있지만 멸종위기 관심종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이에 반해 박쥐는 1,000종도 넘으며 전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

박쥐의 성공 비결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새와 짐승과는 다르게 사는 것이었다. 새와 짐승은 먹을 것과 사는 곳을 두고 자기네끼리 경쟁한다. 만약 박쥐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먹이를 같은 때 먹겠다고 아우성쳤다면 강한 박쥐만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박쥐는 그러지 않았다. 박쥐들은 경쟁하는 대신 각자의 특기를 키우면서 공존의 틀을 찾았다. 사는 곳을 바꾸거나 다른 먹이를 찾거나 새끼 낳는 시기를 서로 달리했다. 자신을 변화시켜서 경쟁을 줄이고 함께 살 방법을 찾은 것이다. 만약 박쥐가 자기만의 특성을 개발하지 않고 서로 충돌해서 센 놈들만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센 놈은 더 세지기 위해 몸집을 더 불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다양한 종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박쥐는 대략 5,000만 년 전에 등장했다. 현재 살고 있는 젖먹이동물 가운데 최고참에 속한다. 박쥐는 무작정 몸을 키우는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무절제한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다. 물론 박쥐의 크기도 다양하다. 2~3g밖에 안 되는 작은 박쥐가 있는가 하면 1.5㎏에 달하는 커다란 박쥐도 있다. 큰 박쥐는 작은 박쥐에게서 갈라져 나오면서 작은 박쥐와 먹이 경쟁을 하면서 억누르는 대신 다른 먹이를 택했다. 곤충은 작은 박쥐에게 양보하고 열매와 꽃가루를 먹이로 선택한 것이다. 몸집이 커진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모험을 했고 그래서 성공했다.

박쥐 사회에서의 정의란 남을 누르는 게 아니라 모든 종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터전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 결과 박쥐는 종도 많아졌을 뿐 더러 장수하는 동물이 되었다. 박쥐와 비슷한 크기의 쥐는 기껏해야 2~4년을 살고 다람쥐도 수명이 3~6년에 불과하지만 박쥐는 10~30년을 산다. 박쥐처럼 함께 나누고 사는 게 잘사는 비결이다. 아무리 사자와 독수리가 어르고 달래더라도 속지 말자. 당당하게 뿌리치고 박쥐처럼 서로 나누며 살자.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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