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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싹쓸이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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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싹쓸이 쇼핑

입력
2015.12.0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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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 초 일본에서는 ‘신조어ㆍ유행어 대상’이라는 게 발표된다. 신문사 등과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하는 것은 아니고 “현대 용어의 기초 지식”이라는 책을 매년 발간하는 출판사에서 시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30년 이상 계속되었고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어 왔으므로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연례 행사다.

올해 대상으로는 ‘트리플 쓰리’와 ‘싹쓸이 쇼핑’이 뽑혔다. 트리플 쓰리란 야구에서 타자가 한 시즌에서 타율 3할 이상, 홈런 30개 이상, 도루 30개 이상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올해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두 명의 선수가 트리플 쓰리를 기록했다.

‘싹쓸이 쇼핑’은 외국인 관광객, 특히 중국인 관광객이 대형 마트와 면세점 등에서 엄청난 규모와 방식으로 쇼핑 하는 것을 뜻한다. 구매 제품은 주로 전자 밥솥, 보온병, 온수 비데, 의약품, 화장품 등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는 주민이 쓰는 생필품까지 동나서 일본에서는 연초부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0위 안에 든 다른 유행어들로는 일본 정치 상황과 관련된 것들이 있다. ‘아베 정치를 불허한다’ ‘실즈(SEALDs)’ ‘1억 총활약 사회’가 그것이다. ‘아베 정치를 불허한다’는 전쟁과 안보법안에 반대하면서 “아베 물러나라”를 외쳤던 반정부 시위의 슬로건이었고, ‘실즈’는 바로 이 시위를 이끌었던 학생 및 청년들의 네트워크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의 약자다.

아베 정권이 만들어내서 유포시킨 ‘1억 총활약 사회’는 1960년대의 소위 ‘1억 총중산층 사회’란 말에 기대면서 일본 국민들 전체를 아베 체제에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이 말이 유행어로 꼽힌 것은 이 말에 대한 일본 국민들 다수의 혐오와 조롱의 분위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의 ‘신조어ㆍ유행어 대상’은 심사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선정된 말과 관련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을 주는 방식을 채택한다. 2014년의 경우, 대상을 받은 말 중의 하나는 ‘집단적 자위권’이었는데, 수상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수상자의 수상 거부라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런 탓에 올해에는 정치적인 배경을 갖는 말이 아닌 ‘트리플 쓰리’와 ‘싹쓸이 쇼핑’이 채택된 게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는 올해 대상 선정 결과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듯하다.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용어가 뽑히지 않은 것에 불만이고, 우파 성향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용어들이 10위 안에 여럿 있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다.

‘싹쓸이 쇼핑(爆買い)’은 원래 말 그대로 직역하자면 ‘난폭한 구매’가 되는데, 한국에서는 ‘폭탄 구매’란 말로 번역되기 했다. ‘폭탄 구매’는 약간 빗나간 번역어로 생각된다. 아무튼 표면적으로 보아서 이 말에는 중국인들에 대해서 일본인이 갖고 있는 경악과 혐오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분명히 이 정서적 경악과 혐오는 소위 일본의 ‘혐한’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 작용의 결과다. 즉 지배 체제는 사회 체제 내부의 적대적 모순을 은폐하고 희석시키기 위해서 소위 외부의 적을 우선적인 표적으로 삼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혐한이나 혐중 등과 같은 표피적인 정서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의 경우 올해 트위터에서 사회 분야의 키워드로 꼽힌 말은 ‘메르스’ ‘광화문’ ‘세월호’ ‘역사 교과서’ 등의 순서라고 한다. 특히, ‘세월호’가 작년에 이어서 올해까지도 연속해서 키워드로 꼽힌 것은 ‘사실은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는 게 트위터코리아 대표 소영선씨의 설명이다. 트위터는 그 속성상 ‘지금 이 순간, 가장 뜨거운 주제에 대한 실시간 토론이 벌어지는’ 소통 공간의 하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트위터 통계에 의하면 ‘세월호’의 연관 감정은 ‘아픔, 분노, 의혹’이고 관련어는 ‘국민, 박근혜, 정부, 대통령’ 순이라고 한다.

세월호 사건을 국민 전체가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혹이 없어져야 한다. 의혹이 없어져야만 분노도 줄어들고 아픔은 시간의 흐름에 맡겨질 것이다. ‘세월호’가 내년까지도 한국의 트위터를 싹쓸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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