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 지분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왼쪽)와 소아과 전문의 프리실라 챈 부부. 저커버그 품에 안긴 아기가 이 부부의 갓 태어난 딸 맥스다. 저커버그 페이스북 캡쳐

한국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가정하자.

국내 굴지의 S그룹 총수 L회장이 기자회견을 자처하더니, 깜짝 선언을 했다. 살아있는 동안 보유 지분의 99%를 기부하겠다는 내용이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도 읽으며 “오늘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너희들이 자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 같은 기부를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대변인의 추가 설명도 이어졌다. 약속한 기부는 유한책임회사(LLC)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재단 기금을 통한 투자는 물론이고 공익사업을 위해 필요하다면 의회 로비 등도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뒤 한국 언론과 시민단체, 또 평소 S그룹에 관심을 가져온 많은 전문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십중팔구 기부 의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LLC를 세우겠다는 내용에 주목하며, 기부 결정의 배경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또 지분 99%를 넘겨도 LLC가 L회장 지배에 놓여있는 만큼 그룹 경영권도 유지하는 것 아니냐며 ‘무늬만 기부’라고 비판할 것이다. L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기부 의사를 되돌려 지분을 LLC에서 돌려 받을 수 있는 점도 집중 공격을 받게 될 게 뻔하다.

결국 정치ㆍ사회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L회장의 ‘꼼수’라는 결론에 도달할지 모른다. 지분을 모두 팔아 현금으로 만든 뒤, 그 돈을 관여할 수 없는 공익재단에 맡겨야만 진정한 기부이지 이게 무슨 기부냐고 반박할 것이다. 더군다나 의회 로비를 하겠다니, 재벌이 돈으로 권력을 사려는 발상이라는 딱지도 붙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L회장의 선행을 환영하던 여론은 순식간에 돌변할 게 명약관화다. 정치권은 기부를 빙자한 재벌의 영향력 확대 시도를 막기 위한 입법에 나서야 한다며 부산을 떨 수도 있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위 사례는 100% 가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하지만 본보 2일자(1면)에도 보도됐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업체인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대주주 마이크 저커버그가 시가로 450억달러(약 52조2,720억원)에 달하는 지분을 위에 언급한 방식으로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한국의 가상 사례처럼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언론도 자선 재단을 만드는 대신 굳이 LLC를 세우려는 데 주목하고 있다. 기부 의사를 대놓고 깎아 내리지는 않지만, 세법에서 LLC가 차지하는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악용 사례를 거론하고 있다. 갑자기 거부가 된 실리콘밸리 청년 사업가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LLC를 설립하는 게 유행이라는 분석도 보탠다.

저커버그의 선행 이면에 담긴 논란이 묻히다 보니, 한국에서는 ‘미국 기업가는 역시 다르다’는 기류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자식에게 악착같이 물려주는 기업은 한국 못지않게 미국에도 많다. 예컨대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암웨이는 두 창업자의 아들ㆍ손자가 대를 이어 경영한다. 기업의 사회공헌활동(CSR)에 대해서도 “사업을 접지 않는 게 최대의 공헌”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일련의 가상 상황과 미국의 실제 상황은 기업 속성이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그렇다고 ‘내 떡’이 정말로 적거나 형편없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저커버그의 깜짝 놀랄 기부를 보고 나니, 오히려 ‘투자도 않고 고용에도 소극적’이라고 욕 먹는 우리 기업이 좀 더 괜찮아 보이는 느낌이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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