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안규철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광화문에 가면 청와대가 있고, 국정화 반대 시위가 있고, 시위를 진압하는 물대포가 있고, 물대포에 쓰러지는 시민이 있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전시가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전시의 의도는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것들의 빈자리를 드러내고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것이다. 그 전시에는 관객이 릴레이식으로 연이어서 책을 필사하는 필경(筆耕) 프로젝트가 있다. 참가자는 전시실에 마련된 ‘필경사의 방’에 들어가 책을 필사한다. 국정교과서 집필자들과는 달리, 필경사들은 정부의 시책에 호응하러 온 소수의 ‘석학’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까운 시간을 내어 자발적으로 참여하러온 1,000여 명이 넘는 일반 관객들이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물대포를 피해 외로운 시위라도 하듯 한 사람씩 필경사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고요히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필경사는 국정교과서 집필자들과는 다르다. 과거에 위대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위대하다고 쓸 필요가 없다. 한반도에는 사계절이 있다고 쓸 뿐, 사계절이 분명해서 좋은 나라라고 쓸 필요가 없다. 앞에 주어진 것을 가감 없이 필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앞에 ‘노비’라고 되어 있으면 ‘노비’라고 써야 한다. 앞에 ‘아무것도’라고 되어 있으면 ‘아무것도’라고 필사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망언의 자유, 역사를 추행할 자유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한 시간 동안 묵묵히 어떤 ‘사실’을 옮겨 적고, 때가 되면 나와야 한다. 마치 주어진 삶을 묵묵히 옮겨 적듯 살아내고, 삶의 방을 떠나야 하듯이. 밖에 있는 관객들은 그러한 필경사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필경사가 옮겨 적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굽은 등과 손뿐이다. 필경사들이 부여 쥔 필기구는 그들의 혈관에 꽂힌 주사바늘과도 같았고, 전시는 그들의 피로 차오른 헌혈 튜브처럼 따뜻했다.

자신에게 어떤 무용담이 있어도, 어떤 울화통이 있어도 필경사는 그것을 자신이 필사하는 곳에 쓸 수는 없다. 그는 어떤 이야기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없다. 다만 주어진 것을 필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필경사가 아니다. 필경사는 아쉬움이 없는가, 그리움이 없는가, 토로할 것이 없는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선승의 몫이다.

사실과의 두렵고 외로운 대면을 마친 필경사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기에 ‘필경사의 방’을 지나면 ‘기억의 벽’이라는 전시실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누구나 지금 이 순간 그리운 것을 카드에 써서 벽에 붙일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현재 주어진 ‘사실’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는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인지, 그리운 대상을 적은 수백 수천 개의 카드가 매일 새로이 기억의 벽에 붙는다.

엄마가 그리운 사람은 ‘엄마’라고 썼고, 회사원은 ‘취업 전의 휴식’이라고 썼고, 오십견이 온 사람은 ‘청춘’이라고 썼고, 배가 고픈 사람은 ‘고기’라고 썼고, 대머리는 ‘머리카락’이라고 썼고, 목욕탕 사장님은 ‘때’라고 썼다. 그밖에 ‘배신한 인간’ ‘빗소리’ ‘구름’ ‘나의 스타일’이라고 적은 쪽지도 있었다. 유달리 많은 것은 ‘자신감’이라고 쓴 쪽지였다. ‘유신’ ‘대통령’ ‘정부’ ‘국회의원’ ‘조선왕조’ ‘대한제국’ ‘고종’ ‘전통’ ‘칼 슈미트(Carl Schmitt)’ ‘학생주임’ 같은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도 ‘유니콘’ ‘천사’ ‘순수’ ‘사랑’ 같이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도 적어 놓았다.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해본 적 없는 것도 그리워한다. 부재(不在)를 견디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진되는 생(生). 지친 사람들은 낮은 곳에 모여, 폴 클레(Paul Klee)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이야기한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그리워한다. 나도 눈물이 흐르기 전에 무엇인가 적어 벽에 붙여 놓았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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